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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 베드로 Nov 03. 2020

프롤로그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나는 비가 오면 빗속을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생명의 어머니 같은 비를 맞으면, 그 옛날 엄마의 등에 엎디어 풋풋하게  전해오던 엄마만의 그 독특한 냄새가 여과 없이 내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비 온 후에 비치는 태양은, 생명을 키우는 아버지처럼 든든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며 다독거려 줄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엄마를 대신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비 오는 한양 도성 길을 따라, 남산공원에 오르니, 인적 드문 백범광장엔, 푸릇푸릇 돋아난 잔디 위로 잔잔한 가랑비가 살포시 내려앉으며 생명력을 돋움 질 하고 있고, 이따금 빠르게 비행하고 있는 까치 몇 마리가 꼬리를 까딱까딱 거리며, 짓 까불기를 하더니 이내 나무 덤불 사이로 모습을 감추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도심은, 그냥 잿빛 하늘 아래 오두 마니 버섯 더미처럼 납작 엎드린 모습이다. 그 속에서는 여전히,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것들은 또 전설처럼 이어지며 오늘의 역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도서관에 들려, 대충 볼일을 보고, 회현동 쪽으로 내려서니, 남대문 시장이 코앞이다.

비가 오기 때문인지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인파가 그리 많지는 않다. 만두를 팔고 있는 가게에는 그래도 여전히 긴 행렬이 늘어져 있고, 가끔 들리는 일본 여행객들이 지껄이는 일본어 소리가 귀에 걸리적거린다. 시장의 모습은 별반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앙꼬 빠진 찐빵같이 뭔가 허전한 것이, 맥 풀린 망아지 마냥 띵하다. 물가는 디플레이션으로 떨어지고 있다는데, 경기가 심상찮음이 체감되는 순간 같아 걱정스럽기 조차하다.  

   

덕수궁 앞은 뿔피리 소리에 맞춰, 수문장 교대식이 한창인데, 잔잔하든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진 탓에 약식으로 교대를 마무리 짓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그 옆의 임시막사 안에는 잔뜩 쌓아놓은 생수병을 뒤로하고 태극기 부대 두 늙은이가 비 오는 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죄 없는 우리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이념과 사상은 무엇이며,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관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고 헛갈리기 조차하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나뉘게 되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언제까지 반목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응시하던 두 노인네의 모습이 내내 눈에 밟히면서, 오늘, 나를 우울하게 한다.


가을장마는 이어지고, 곧바로 태풍이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하니, 어쨌거나 비는 당분간 계속 내릴 것 같다.   

  

지구의 역사가 40억 년, 억조창생의 그 많은 무리 중에 한낱 먼지에 불과한 나의 존재가치는 과연 있기나 할까? 그것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나는 내 역사를 쓰고 싶었다. 가장 오래된 내 기억의 주머니를 헤집어 본다. 그때가 언제쯤이었을까?

        

1956년 봄. 좁지 않은 신작로엔 항상 먼지가 풀풀 날리고, 이따금 소달구지에서 떨어지는 쇠똥이 흙먼지와 뒤섞여, 바닥은 온통 쇠똥 천지였다. 머리를 빡빡 깎은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그 길을 재잘거리며 걷고 있었고, 그렇게 조그만 둔덕을 넘으면 저만치 학교가 보였다. 휴전 후 겨우 3년 된 그해,  나는 이 길을 걸으며 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었다. 바로 초등학교 입학이었다.


 내손을 놓칠세라 힘을 주던 막내 고모의 손을 부여잡고, 처음 들어서던 교문에는 군인들이 집총을 한 채 서서 무표정한 자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질서를 채 찾지 못하고 어수선하던 그때의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떨어지던 쇠똥과 뒤엉킨 바닥에서 흩어지던 흙먼지와 함께 코끝으로 베여 들던 그 냄새는, 왁자지껄 하게 떠들던 아이들 소리에 묻혀, 공중으로 흩어져 이내 사라진다. 붉은 벽돌로 된 강당을 지나 펼쳐지는 운동장엔, 뒤섞인 봄 안개와 햇볕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질서를 향해 행진하던 무질서의 아름다움이 같이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이 모든 것들은 내 기억 저편에 고운 무지개로 남아, 엣 날의 향수를 부드럽게 일깨워 주곤 한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인생 추억 만들기’의 첫 단추를 끼우기 시작했다.    (2018. 10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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