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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 베드로 Nov 02. 2020

은퇴, 그 후 2년-

시장을 보러 가는 아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바람 난스럽 다. 물기는 없었지만, 간간히 뿌려대던 빗물을 바람이 품으면서 제법 음습하다. 코로나의 광풍이 세상 전체를 흔들고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이 뒤숭숭하고, 모두의 눈동자들이 풀리고. 데꾼들하다. 아파트 언덕을 앞서 내려가는 아내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반백으로 변해버린 은갈색나부낌이 애잔하게 보이며, 미세하게 가슴이 아. 정수리 주위는 이미 개미 운동장 만한 개활지(?)가 생겨, 불어오는 바람이 더 을씨년스 느껴진다. 칠십을 눈앞에 둔 여인의 마음은 엣적이나 변함이 없는 듯한데, 드러난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이 황량하기가 이를 데 없다. 흑색의 기가 자랑스러웠던 모발과, 고왔던 그때의 그 사람은 여기에 그대로 있는데, 세월가시 그녀에게  상체기를 남겼고, 그 상흔이 오늘 나를  프게 하고 있다.

 

때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고, 햇살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따사로움을 발하고 있었다. 그 많은 시간영겁일 줄  알았는데, 벌써 종착역이 눈앞에 보이며 우리는 서서히 그 착점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고만 있다. 싱그럽던 바람도  상함을 잃은 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빨강, 파랑, 노랑의 원색들만  춤추던 시야는 온통  잿빛으로 바뀐 지 오래되다. 오늘 부우중충한 풍이 이 서글을 더 해주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머리 염색을 부탁다.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꽤 자주 볼 수 있는 하얀 아내의 머릿결이 참 안쓰럽게 보였었고, 여자들의 미용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아내는 나에게 부탁을 해놓고도 나의 손솜씨를 믿을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는 듯,  빤히 쳐다보며

""당신 할 수 있겠어요?"  

하며, 물었다. 이미 일을  놓아버린 나의 은퇴 이후의 생활은 어언 2년이 가까워지고, 조금씩 조여 오는  노후경제의  실은 아내의 씀씀이를  조금씩 압박하고 있는 듯했다. 다들 그렇고 그렇산다고는  하지만, 되묻는 그녀의 말끝에 베여 있는 세상살이의  고단함은 어쩔 수 없는 쏴한 아픔이 되어 나의 폐부에 가라앉는다.


처음 해보는 나의 염색 솜씨가 마음에 들 리가 있을까 마는, 빗으로 빗고, 약을 묻히고 다시 빗고 하는 동안 아내는 무던히도 말을 아끼며 잘 참아내고 있었다. 속속들이 그리고 알알이 드러나는 그녀의 속 알 머리는 생각보다 더 많이 하얗게 변해있어, 많은 시간과 주의가 필요했, 그에 따른 나의 손놀림도 조금씩 빠지며,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아울러 실수도 잦아지고 있었는데, 급기야 "앗! 따가워!"" 하는 낮은 비명과 함께, 퉁명스러운 그녀의 핀잔과 불만이 조금씩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은퇴 이후, 나의 일상은 거의 아내와 함께이다. 어쩔 수 없는 껌딱지가 되어버린 그녀와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무념의 시간들을 보내며, 삼식이와  삼순이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부부의 젊은 시절, 나의 역마살 기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주 떨어져 지내던 편이었다. 직업선택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잦은 해외파견근무와 지방근무, 우리 각자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생활의 패턴은 어느 듯 몸에 베,  은퇴 이후 나의 생활은, 한동안 무력감에 빠질 정도로 침체되고,  허탈해있었다. 그러던 내가 이렇게 아내와 매일, 온통 하루를 같이 보내며 콧김조차 서로 나눌정도가 되다 보니, '이거야 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고,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하릴없는 세월을 그냥 낭비만 하고 있었다.


흔히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읊조리고 있지만, 나는 뭐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선에서 도태되어, 튕겨져 나온 수많은 파편 중 작은 쪼가리에 불과했으므로 나의 은퇴 후에 대하여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생로병사의 순리에 따르는 평범한 범부의 삶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터라, 오는 운명과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며 살기를 작정한 필부에 불과했다. 게 이야기하자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미지근하다고나 할까?


렇게 염색을 끝낸 아내가, 따듯한 온수에 머리를 감고 나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거울 앞에선 그녀는 까맣게 된 자신의 흑발에 만족하는 듯, 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이렇게 나의 염색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앞으로 그녀의 전속 염색 쟁이로서의 임무는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비로소, 은퇴 이후 내가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샘이었고, 도태된 찌꺼기가, 튕겨져 나온 쪼가리가 어언 2년 만에 작은 몫이라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 잠시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다.


연신내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25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이에 시나브로 실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어쩐지  바람이 그렇게 유별나다 했더니 하늘이 금세 시커먼 먹구름으로 변, 이내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빗줄기가 다.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져, 걸어가려던 계획을 접고 전철을 탔다. 마침 퇴근시간과 겹쳐 저 열차 안이 꽤 복잡다. 모두들 마스크에 두 눈들만 휑하게 보이며, 도무지 활기와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 맥 풀린 모습이다. 연신내 역에서 하차한 우리는 엘리베이터 공사가 한창인 좁은 입구를 피해 주위의 상가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올라서니, 바로 연서시장이 눈 앞으로 펼쳐진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서울에서 제일 저렴하고, 물건 또한 다양하게 많다고 한다.


좁디좁은 시장은 좌우로 펼쳐진 노점상들의 물건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가뜩이나 좁은 통로엔 사람들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코로나의 공포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생존의 경쟁과 활력만이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의 열차 안의 맥 빠진 모습들과는 딴판인 이 곳 바로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아가미와 같 모습이었다. 아내의 꽁무니를 따라 안을 비집고 들어서니, 각종 먹거리들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김밥 떡볶이 어묵 순대 만두 찐빵 치킨 잡체 돼지수육 등등, 상인들의 호객소리와 왁자지껄한 군중의 소리가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공중으로 흩어지며, 시장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아내는 호박과 가지를 만지작 거리며 승강이를 하고 있고, 나는 물끄러미 하늘을 본다.  언제 비가 그쳤는지도 모르게 날씨는 개이고 있으며, 동쪽 끝으로 파란 하늘이 쌀짝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심부 저 깊은 속에서 잠자고 있던 지극히 원초적이고, 뜨거운 생명력이 순간 꿈틀 되고 있음을, 내가 느낀 것 바로 그때였다.

                                (2020. 09.  비 오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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