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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 베드로 Nov 01. 2020

죽음에 대한 소고

지난 주일 오후부터의 발열은 그 시작부터가 도무지 심상치 않았다.  아니다 다를까 조기경보기인 목 부위의 편도선이 목구멍을 메울 정도로 부어오르고, 전신으로 퍼지는 무서운 열기는 나를 아예 불덩어리로 만들고 있었다. 이러다가 영원히 눈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심했다. 아물거리는 의식의 자락을 잡으려고, 급기야 차가운 마룻바닥에 누워서 한기와 열기를 동시에 싸안았다. 한기에 전신이 후들거리고, 열기에 두 눈은 불두덩이가 된 데다,  머릿속으로는 기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처럼 굉음이 연신 들리며 나를 더 깊은 고통의 수렁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나는 참 몸이 약한 편이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도 결혼 후 많이 나아진 것이 현재의 내 모습이란다. 지금도 아내 화장대 구석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퇴색된 결혼사진에는  지구 상에 홀로 남은 ET 같은 놈이 웬 이십 대의 가씨와 팔짱을 끼고 멍하니 서있다. 그 ET 녀석을 조석으로 먹이고 입히고 해서 오늘의 내가 되었다 한다. 벽녘에 겨우 높은 열에서 조금 벗어난 나는 기진한 상태에서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서 이야기하듯 '생로병사'의 큰 수레바퀴 속에 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티끌에 불과하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세상은 조금의 미동도 없을 것이며, 해는 어김없이 뜨고 지며 역사의 흐름도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도 또 내일도 그냥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인간의 출생은 하느님의 축복이라 했거늘, 이 축복의  완성인  죽음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지는 않겠는가?  나는 일찍부터 꽤 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타인의 일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때그때마다 한두 걸음을 지체하면서까지 순간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것이 바로 나의 확실한 세상으로부터의 종말 이기도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내 친구 '상복'이의 죽음을 접한 후부터였다. 중학교 일 학년  때의 첫여름방학은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아름답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 이학기 첫 등교날 그의 자리는 비워져 있었고, 그 비워진 공간은 나에게 죽음이 전해주는 최초의 슬픔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대구  칠성동 무연탄 하치장 근처에 살고 있었던 그는, 더우면 의례히 뛰어들던 시커먼 웅덩이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열세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대문니가 유난히 사각지고 넓었던 그 친구는 언제나 까만 물을 뒤집어쓴 체 나의 뇌리에 영원한 슬픔의 영상으로 자국 져 있다. 또한 연세대 졸업을 불과 석 달을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나의 영세 대부를, 땅에 묻으며 내가 느낀 죽음은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어 나를 무감각의 경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불과 열여덟이었다


우리는 내일을 모르는 지극히 시계불량인 상황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늘에 자신을 던져 최선을 다함이, 또한 지극히 인간적이며 우리의 사명임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해, 오늘 우리가 최선을 다 할진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정확한 인간의 '영원한 잠'에 대한 준비나 대비는, 그 적중률 100%에 비해 참으로 미비하다 아니할 수 없다.  과연 내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과제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을 정신적 또 육체적으로 돌보는'Hospice' 란 봉사단체에서는 죽음을 또 다른 차원에서의 '시작'임을 일깨워준다. 구태여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더라도 불확실한 사후세계에 대한 환자의 불안한 심리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미래 지향적인 그 메시지는 환자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왕에 맞이 해야 할 죽음을 좀 더 편안하고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죽음은  곧 끝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죽음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임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비중 있는 희망을 제시 함으로써 그들에게는 물론이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까지도 죽음에 대한 인식전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스타트라인에 선 육상선수들을 한번 상상해 보자. 여기에 서기까지의 노력과 그동안 흘린 땀방울이 생각이 날 것이고, 인내와 고통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 올랐을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그들은 사실, 결과에는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다 한다. 오히려 긴장감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다고 했다. 좋으면 좋을 것이고, 나쁘면 나쁠 그 결과보다는 이때껏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게 느꼈다는 것이다.


죽음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도 이러했으면 싶다. 평화롭게 또 차분히 자신의 임종을 맞이하는 분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먼 여행을 떠나기 전 집안 정리를 하듯이 해놓고는, 그렇게 떠나셨다. 마치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1막이 끝나고,  다음 무대를 준비하듯이 차근차근하시던 그분의 2막은, 아마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출발을 위한 준비가 충분하였을 때 우리의 마음은 가쁜해짐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준비기간 동안의 어려움 또한 많았음도 잘 알고 있다. 현실에 충실함이 지극히 당연하듯이 다가올 미지의 세계에 대한 준비 또한 당연히 해야 함이 타당할 것이다.

하느님 축복의 완성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봐야 되지 않나 싶다.


나는 이틀을 더 끙끙거리다가, 열기가 가시면서 비로소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그동안 비워져 있던 위장을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  허겁지겁 먹으며, 나는 혼자 중얼거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이 지독한 고통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고.   (1995.10.5. 중앙일보.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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