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성 Jul 25. 2020

우리는 무엇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얼마 전, 온 세계를 들썩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흑인 청년 총격 사건 이후 다시금 'Black Lives Matter' 구호를 내건 대규모의 흑인 민권 운동(Black Power)이 벌어졌었다. 이번 민권 운동은 급속도로 발전한 사회 관계망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을 실은 운동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조지 플로이드를 보며 분노하고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우리 일도 아니고, 심지어 같은 동양인이 피해 본 사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공감의 측면에서 해석해보고, 제삼자인 우리가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당사자인 경찰과 흑인의 입장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고 어느 한쪽을 비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려 한다.





'공감'과 '정서 전이'


≪사회적 공감≫에서 엘리자베스 A. 시걸 교수는 공감의 요소를 정서적 반응, 정서에 대한 정신적 이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 관점 수용, 정서 조절의 5가지로 보았으며, 더불어 맥락에 대한 이해와 거시적 관점 수용을 통해 사회적 공감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부분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Self-other Awareness)'이다. 모든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과 유사한 부분을 가지고 그것을 인식하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뚜렷한 자아의식을 가진다. 누군가의 감정이나 행동에 동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나의' 감정이나 행동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교수는 상대방의 감정이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을 넘어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인식하는 순간, 공감이 아닌 '정서 전이'가 발생한다고 덧붙인다. 똑같은 코미디 영화를 봐도, 옆에 있는 사람들이 박장대소로 웃으면 괜히 더 웃기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이것은 전후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저 정서의 파도에 휩쓸려 가는 '비합리적인 주정주의(Emotionalism)'가 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다. 


즉, 상대방의 정서를 전후로 이해하는 '공감'과 그것을 나에게로 가져오는 '전이'는 별개라는 것이다. 공감이란 외부 자극에 대해 내적으로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그것을 정신적으로 이해하며, 나의 것과 구분 지으며, 외부의 관점을 수용하고 표출하는 정서를 통제하는 복잡한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정서 전이는 그저 외부 자극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의 관점이나 전후 맥락 등을 알지 못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과 '거시적 관점'


흑인은 백인에 의해 오랜 시간 철저히 외집단으로 구분되었다. 문명 간의 차등적인 발달에 따라 원주민들은 폭력적인 수단으로 배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20세기 흑인 린치나 홀로코스트 등의 역사적 사건들로 대표된다. 이것은 인종 차별의 역사적 맥락이며, 인종주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는 학교 수업에서, 각종 서적에서, 쏟아지는 뉴스에서 이러한 인종주의와 관련한 야만적인 행위, 즉 역사적인 맥락들을 봐오면서 '인종 차별은 나쁘다'라는 관점을 형성했다.


우리가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살아오면서 인종 차별에 대한 맥락을 학습하고 올바른 관점을 만들어왔기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우리가 과거를 알 길이 없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발생하는 인종 차별 사건에 대해서, 어느 쪽을 더 안타까워해야 할지에 대해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위 공감의 요소에 비춰 말하면 '맥락에 대한 이해와 거시적 관점 수용을 통한 사회적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흑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고 나서, 사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었다. 조지 플로이드는 뉴스의 제목과는 다르게 '선량한' 흑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조지 플로이드는 마약 소지, 주거지 무단 침입, 총기 강도 등의 여러 전과가 있었던 것. 이것이 밝혀진 이후 '흑인들이 이를 억지로 명분 삼아서 폭동을 일으킨 거다'라는 관점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등을 돌린 이들은 '충분한 관점 수용'에 실패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요즘 SNS에서는 '중립 기어를 놓겠다'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있다. 특정 논란이나 분쟁에 대해 '확증이나 공적인 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 누구의 욕도 하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충분한 관점 수용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조금이라도 기울어진 사건들에 대해서까지는 이러한 과정이 흔치는 않다.





광의적인 해석


이제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서 우리의 일상으로 넘어와보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논란과 분쟁을 접하며, 때때로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그것들에 대해 우리는 단순한 '정서 전이'에 의한 옹호나 비판을 지양해야 하며, 충분한 맥락 이해와 관점 수용으로 '올바른 공감'을 할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있는 학생을 혼내려 하다가도, 그 학생이 심각한 몸살 기운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따뜻하게 타일러주며 보건실에 보내줄 것이고, 되려 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 선생님은 계속 엎드려있는 학생을 꾸짖기 전에, 혹시 그 학생에게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상적인 사례로부터 '올바른 공감을 통한 문제 해결'을 학습할 수 있다.


한 가지 문제점은, 맥락과 관점을 충분히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에 큰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모든 논란과 분쟁에 대해 그 맥락과 관점을 모두 파악하려면, 아마 대부분 파악이 끝나기도 전에 사건이 끝나 있을 것이다. 이에 의하면 '올바른 옹호와 비판'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내 글의 의도는 '옹호와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올바른 공감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은 필수적이며, 그에 따라 '아니면 말고'와 같은 식의 반응이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말고'라 해도 당사자가 그 반응의 요점(지지와 비난 등)에 의해 느끼는 정서는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연예인 악플 테러' 이슈와도 연관이 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이슈이든, 친구와의 작은 논쟁이든, 우리는 사실 사건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자격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다만 그 사건 안의 부수적인 요소들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뿐이다. 이를테면 조지 플로이드를 과잉 진압한 경찰의 행동,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정도로 지나치게 폭력적인 시위와 같이 말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객관적인 잣대만을 가지고 사건 자체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가능성'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올바른 공감에 대한 의식 발전으로 인종뿐만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사회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참고 :  엘리자베스 A. 시걸, 「사회적 공감」, 안종희(역), 생각이음, 2019.



매거진의 이전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의 공통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