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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Mar 25. 2023

전무님께서 관심 갖고 계신 사안으로

고작 그게 논리야?


업의 특성상 이곳 저곳과 협업을 많이 한다. 다양한 외부 업체와도 만나고, 내부 유관부서와도 소통한다. 그러다보니 업무 요청 메일을 많이 받는다. 아무래도 모든 프로젝트를 대면으로 회의하고 협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보니, 나도 메일로 소통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요청 근거와 히스토리 기록에도 이메일은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이메일을 통한 소통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작성자의 수준에 따라 상대방이 이해도와 공감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 와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는 문장에 사용된 철자는 완전히 같지만, 읽는 사람이 이해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과 비슷하다. 그 만큼 정성들여 작성, 퇴고를 거친 뒤에 신중히 발송해야 한다.


오고가는 메일을 읽어보면 일하는 사람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 번을 읽어봐도 맥락이 이해되지 않는 메일이 있는가 하면, 짧고 간결해서 목적이 순식간에 와닿는 메일이 있다. 이건 일종의 글쓰기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역량이 아니다. 자꾸 쓰고, 피드백 받고, 노력하면 점점 향상된다. 글쓰기 능력은 개선하면 된다. 쓰면 쓰는 만큼 점점 나아진다. 노력하면 발전한다. 하지만 글쓰기 능력과 다른 관점에서 나쁜 메일이 있다. 이건 고치기 어렵다. 개선하기 쉽지 않다.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장이 전체 맥락의 핵심인 메일이다.


'전무님께서 관심 갖고 계신 사안으로'


업무를 요청할때는 그 근거와 배경을 명확히 설명하여 상대방의 공감을 얻고 납득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대 조직은 그렇게 운영된다. 7~80년대처럼,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아!' 라고 지시하는 조직은 도태되었고, 망했다. (혹은 망해가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IT 기업들이 왜 그렇게 조직원들의 공감과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피드백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더욱 더 명백해진다. 예전 한 대기업의 예를 들면 '미래전략실(미전실)' , '구조조정본부(구조본)' 등 그룹 차원의 헤드쿼터가 '명령'하면 계열사는 '따르는' , 전형적인 상명하복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결국 해체되었다. 그런 시대는 지났다. 많은 회사들이 '타운홀' 미팅에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조직원들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위와 같은 문장이 핵심 논리인 요청 메일은 너무 촌스럽다. (나는 후진걸 싫어한다.)



'전무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사안으로' 이 문장의 문제는, 포커스가 요청 사안에 대한 고민에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업무 요청 메일이라면, '이 일을 요청하는 이유는 이렇고, 이런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해결하면, 이런 효과가 있다.'라는 구체적인 근거 혹은 논리가 핵심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 깊은 고민은 안하고, '이거 안하면 우리 전무님한테 혼날텐데?' 식의 문장만을 강조해 업무 진행의 당위성을 얻으려하는 추잡하고 촌스러운 행동. 포커스가 원시 시대처럼 '힘의 논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저런 메일은 회사가 얼마나 촌스러운 문화가지고 있는지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 그런 조직에서는 저런 메일이 실제로 통한다. 전무님한테 혼날까봐 우선순위를 높여 진행해주는 것이다. 저런 문장이 힘을 갖고 회사를 떠돌게 되면, 결국 남는건 정치질 뿐이다. '누가 더 힘있는 전무를 모시느냐' 에 따라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 '무엇이 맞느냐'는 논의보다 '누구 파워가 더 세냐'가 회의의 결과를 바꾼다.


이런 조직에서는 회의할 때도 웃기는 장면이 펼쳐진다. A팀과 B팀이 협의 회의를 진행 할 때, A팀의 팀장이 참석한다면, B팀도 팀장이 꼭 참석해 급을 맞춘다. B팀의 실무는 대리이고, 팀장은 참석할 필요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지만, A팀의 팀장이 참석하니까 급을 맞춰 억지로 참석한다. "감히 대리따위가?!!" 라는 '힘의 논리'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다. 혹시 싸움이 나면 직급의 높이로 찍어 누를까봐. 이게 무슨 쓸데 없는 리소스 낭비인가.



물론 '전무님이 챙기고 계신 사안이다' 라는 문구가 모두 문제되는건 아니다. 프로젝트 진행의 배경과 추진 근거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논리가 요청 메일에 잘 정리되었다면, 끝 마무리에 '전무님이 관심을 갖고 계신 사안이라 저희도 신경쓰고 있습니다.' 라고 언급하는 건 전혀 상관없다. 상위 레벨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 근거와 고민도 없이, 메일의 주 내용이 '전무님이 관심갖고 있으니 잔소리 말고 그냥 해' 일 때다.


우선순위 혹은 작업의 당위성이 고작 '전무님이 관심 갖고 있어서'.

설사 전무님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실제로 중요한 일이고 회사의 방향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갖겠지) 오직 전무님 파워에만 기댄 저런 메일을 쓰면 안된다.


논리와 근거를 준비해야지.

당위성은 거기서 오는 것 아니던가?


저연차들이 잘 모르니까 실수로 저런 메일 날리는 것 아니냐고? 10년도 더 된 시니어들이 저런 메일을 쓴다.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설득할 논리를 그려낼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니어 아래에서 보고 배운 주니어들은 어떨까. 그걸 그대로 따라한다. 이제 갓 업무를 배우기 시작한 1,2년차 주니어들이 메일에 '전무님이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시기 때문에' 를 코어 논리로 내세운다. 선배들에게 보고 배운게 그거니까.


자기들 스스로도 왜 해야 하는지, 상대방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 같은 생각은 할 능력이 없다. 우선순위 조정의 원칙? 그런게 있을리가. 오직 전무님 눈치를 보며 기계처럼 반응하는거다.


업무를 요청할 땐 문제에 대한 공감을 통해 추진력을 얻는 것이 우선이다. 숫자와 내러티브로 그걸 만드는게 능력인데, 그걸 못하니까 '전무님이 시키는데 너희 안할 수 있어?' 로 동력을 얻으려 한다.


상대방을 움직이게 만들려면 '설득'을 해야 한다.

설득하려면, 나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하자. 우리는 파충류가 아니다.


고민에 투자한 시간과 깊이 만큼 성장한다.

그래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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