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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Jun 07. 2023

미니멀, 정책은 최대한 단순하게

예전 전자레인지에는 버튼이 수십개 달려 있었다.

'파스타' , '피자' , '국' , '탕' , '찌게' , '스프' , ‘찜’ , ‘조림’ 등 음식 종류별 버튼.

'접시' , '대접' , '컵' 등 음식 그릇별 버튼.

'생선' , '고기' , '야채' 등 음식 재료별 버튼.

'1조각' , '2조각' 등 음식 볼륨별 버튼.

등등등



글자가 작아 잘 읽히지도 않는 버튼이 많다.

'어떤 음식이든' 다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버튼이 필요하단다.

음식 조리 시간도 ‘127초’, 뭐 이렇게 돌리고 싶었나보다. 아예 0123456789 숫자패드를 달아놨다.


내가 저 많은 버튼들을 써봤는가? 라고 되돌아보면,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저 버튼들이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동작을 하리라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생선' 과 '고기' 버튼이, 전자레인지 내부에서 다른 방식으로 열을 가한다? 잘 모르겠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큰 의미 없는 분기일 것 같다. 복잡도만 높아질 뿐.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전자레인지에는 버튼이 딱 두 개 밖에 없었다.


'30초' , '취소'


버튼을 한번 누르면 30초 돌아가고, 한 번 더 누르면 1분이 되는거다.

10초만 돌리고 싶으면, '30초'를 누르고 앞에서 기다리다가 10초 지나서 취소를 누르면 된다. 그 10초를 전자레인지 앞에서 허비하는 게 인생의 낭비로 느껴져서 불편하다면, 수십개 버튼이 달린 전자레인지를 구매하면 된다. 인간의 만족 포인트는 다양하다. '30초' , '취소' 버튼을 가진 전자레인지는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만족시킬 것이다. 적어도 나는 ‘127초’를 입력할 일이 없다.


‘30초’ , ‘취소’ 단 두개의 버튼.

얼마나 아름다운 UX인가?

단순함은 이렇게 유저에게 뜻 모를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각종 IT서비스 요구사항을 다룰 일이 많다.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은 정책이 쓸데 없이 복잡하고 다양할 경우이다.

'이럴 땐 저렇게' , '또 이럴 땐 그렇게' 등등 사업에서 요구하는 정책은 그저 다양한 케이스를 나열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정책을 가져오기도 한다. 깊은 고민이 부족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나 또한 고민의 깊이가 매우 부족하다. 그래서 더 노력한다. 서비스를 설계하다보면 정책이라고 부를만한 기능이 수십, 수백개는 리스트로 떨어진다. 그럼 나는 그걸 줄이고 또 줄인다. 불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빼내고 쳐낸다. 굳이 없어도 되는 것, 전체의 0.001% 유저만을 위한 것, 투입하는 리소스에 비해 효과가 미미한 것 등은 제거한다. 그래서 온전한 하나의 문장으로 남을 때 까지. 에센스를 찾는다. 본질만 필요하다. 나머지 기능 들은 ‘단 하나의 정책’에 따르는 부수적인 줄기일 뿐이다. 나는 그 단 하나의 문장을 찾기 위해 가장 많이 공들인다.


전자레인지가 요구하는 수 많은 기능들.

'찌게도 끓여야 하고'

'스프도 만들어야 하고'

'피자도 구워야 하고'

등등등 의 많은 요건들은 결국,


'음식에 일정 시간 열을 가한다' 로 귀결된다.


다른 버튼들은 다 부차적인 찌꺼기들에 불과하다. 음식에 일정시간 열을 가하면 되는 건데, 그 단 하나뿐인 에센스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 모든 PM들이 마찬가지일테다.

(혹시 여기서 전자레인지의 원리를 설명하며, '그건 열을 가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진동수의 마이크로파가 물 분자를 진동시켜, 회전운동을 통해 에너지를 확신시키는 건데요?' 라고 딴지를 걸 분은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 분들은 정책 회의에서 많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올바른 PM이라면 사업의 모든 요구사항을 개발팀에 그대로 전달하면 안된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진정한 근본, 저 깊은 바닥에 위치한 단 하나의 원칙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Why? 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머지 로직 분기나, 화면 플로우는 그 원칙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부산물일 뿐이다.


너무 복잡하고 경직된 정책은 안된다. 우리는 로켓을 만드는 게 아니다. 단순하고 명확하게 동작하는 기능. 단 하나의 근본에 집중하자.

기능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우주선의 일부를 만드는 것 보다, 완벽한 자전거 한대를 만드는 것이 훨씬 의미있고 실용적이다.


스티브 잡스는 1997년 애플에 복귀한 후 2년 동안, 제품 종류의 '단순화'에만 집중했다. 애플이 당시 생산하던 350개의 제품 중,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10개의 제품 만을 골라냈다. 나머지 제품들은 생산을 중단했다. 라인업을 단순화했다. 애플이라는 회사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가치를 Why라는 질문을 통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 후, 그 근본, 에센스에 걸맞는 제품들로 판매라인을 집중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도 단순한 정책을 원했다. 디자인만 심플한 게 아니었다. 그의 성공 배경엔 미니멀리즘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나는 아래 사진 속 패드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정책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한번 곰곰히 고민해 봐야겠다.

치킨데리야키는 치킨의 하위 카테고리 아닌가? 따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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