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명동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하셔서 근처 맛집을 많이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맛집이 있다며 국민학생인 나를 데리고 명동 어딘가의 오래된 전통가옥으로 데려갔다.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른들이 다닥다닥 앉아서 방짜유기 같은 놋그릇에 곰탕을 먹는 광경이 생경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앉으라고 하고 곰탕을 시켜주셨다. 어린 나는 그게 그렇게 맛있는 줄은 모르겠더라. 그냥 고깃국이잖아.
거기가 바로 하동관 본점이었다. 벌써 수십 년 전 이야기구나. 내가 어느새 당시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이젠 그 고깃국이 나도 맛있다.
명동 하동관은 4시까지만 운영해서 먹기 어렵다. 주말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하니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종종 코엑스에 있는 분점을 찾는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왜 갑자기 곰탕이 먹고 싶은 날이 있잖은가.
근처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후배 김부장을 불러냈다.
고생하는 우리 김부장 국밥 한 그릇 사줘야지. 하동관에서 만나자.
하동관 코엑스점에 도착했다. 김부장은 시간에 맞춰 잘 왔다.
입장했다. 한가하다. 인기가 없어진 건지. 아니면 방문한 시간이 애매한 건지 잘 모르겠다. 아직 본격적인 저녁 식사 시간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밑반찬이랄 것도 없다. 김치와 깍두기가 전부. 곰탕에 무슨 반찬이 필요하겠냐만은.
더운데 우리 맥주 딱 한 잔씩만 합시다.
여기 맥주 한 병 주세요.
나왔다. 곰탕. 밥은 말아서 나온다.
국물. 맑다. 맑다는 말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투명하다‘보다 ‘맑다’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대체 이게 뭐길래. 고깃국물 그 자체.
파 넣고.
소금 간하고, 후추도 좀 뿌려서, 이제 먹어보자.
고기가 적당히 들어있다. 많지도 적지도 않다.
김치는 살짝 익은 새콤한 맛이다. 맑은 고깃국물과 잘 어울린다.
고깃국물에 흰쌀밥. 한국인의 기본 맛.
깍두기도 올려서 먹는다.
김치도 올려서 먹고. 거의 다 먹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양이 줄었다. 내가 많이 먹는 체질로 바뀐 건가, 체감상 양이 줄어든 느낌이다. 재료값 상승으로 조치가 취해진 건지 뒷이야기는 잘 모르겠다만.
벌써 다 먹었다.
뭐 설명할 것 없는 맛이다. 흰쌀밥에 고깃국. 누구나 다 아는 맛. 하지만 그 '누구나 아는 맛'을 꾸준히 유지하고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니, 이런 오래된 가게가 사랑받는 거 아닐까. 원래 '꾸준한 게' 제일 어려운 거다. 다들 회사 생활 하면서 느끼셨을 테지만.
고깃국에 밥이 먹고 싶을 때마다, 앞으로도 찾을 예정이다. 여기만 한 곳이 없더라. (사실 또 다른 곰탕집이 여기저기 있긴 하다. 나중에 또 소개하는 걸로)
가볍게 한 그릇 뚝딱 하고, 김부장을 그냥 보내줄 수 없어서 차 한잔 하기로 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
근처 커피빈으로 왔다. 여기 층고가 높아서 맘에 든다.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는 마음이 편하다. 나는 이런 곳을 좋아한다.
헤이즐넛 라떼를 시켜놓고 김부장과 매우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어쩐지 더 친밀해진 기분이다. 개인적인 내용이라 여기 기록하진 않겠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계는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서로 속삭이며 유대감을 높였잖는가.
만나서 반가웠고, 조만간 또 봅시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