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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Jul 08. 2021

저도 '일 잘하는 시니어'가 되고 싶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언제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나싶게, 회사 생활을 제법 오래 했다.

주니어/시니어를 구분하는 기준을 오로지 연차로만 보자면 나는 명백한 시니어다. (물론 능력은 주니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니어도 마찬가지지만, 시니어도 사람이기에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싶다.

시니어들이 일을 잘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늘 고민이다. 세부 업무를 주니어들과 같이 진행하는 리더급 시니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일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주니어들과 같이 일하며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자, 잠시들 회의실로 모여볼까요~~"

기획 파트의 리더인 앤더슨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회의를 소집한다. 기획 파트는 ㅇㅇ서비스의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조직이다. 시니어PM 앤더슨과 주니어PM 두 명으로 이루어졌다. 

앤더슨은 주니어 두 명을 화이트보드 앞에 앉혀놓고, 일장연설을 시작한다. 이전 회의에서 또 뭔가를 듣고왔으리라. 늘 이런 식이다.

"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일단 히스토리를 좀 설명할께요."

그는 검은색 보드마커를 들더니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시작한다.

"우리 여기 시스템이 ㅇㅇ가 있고, ㅇㅇ도 연관이 있죠. 음. 그렇지. 아무튼. 그래서 이 두 서비스가 좀 힘들어요. 아, 이거 할때도 정말 힘들었는데. 그런데, 이 시스템 쪽에서 그 데이터를 통한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게 좀 쉽지가 않아요. 여기 보면 이런거 이런거 이런거 이렇게 되어있고, 여긴 또 구축되지도 않았고, 담당자도 없고,"


보드에 무슨 아키텍쳐를 그리는 것 같은데, 봐도 잘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그림을 못그린다. 선도 삐뚤빼뚤, 서비스 위치도 여기 그렸다가 저기 그렸다가 맥락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보드에 쓰여지는 내용은 정리가 안되어 있고, 흐름도 없고, 내러티브도 없는 기억에 의존한 중구난방식 설명이 이어진다. 이야기가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갈지 자로 휘청거린다.

"음, 그래서 지금 이렇다는 거에요. 상황이 쉽지 않아요. 이해가 가죠? 알겠죠?"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데, 무슨 얘긴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앤더슨은 주니어PM들이 뭔가 하길 원하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지 이게. 아니 뭘 하라는건 맞는건가? 단순한 지식 전달이었나?


걱정마라, 

사실 앤더슨도 자기도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모른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


대한민국에 있는 많은 IT회사에서 하루에도 열두번씩 벌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는 화이트보드에 뭔가(아키텍쳐 구성도가 단골 손님이다.)를 열심히 그리면서 설명하고, 그 앞에서 누군가는 열심히 추측을 해야 한다.


이런 경우,

일의 목적,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 동기 부여. 이런 건 남의 나라 이야기다. 원하는게 뭔지 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깊은 수준의 사고를 할 수 있겠는가.

저런 설명을 3~40분 정도 듣고나면 참 난감하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 듣긴 들었는데, 뭘 어쩌라는 소린지. 남의 나라 얘기 같다.


나는 저런 상황을 보통 '업무를 던진다' 라고 표현한다. 

어디서 뭘 듣고와서, 귀찮으니까 그냥 일단 '던지는'거다. 제대로 던지면 괜찮다. 던지는 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마구 난사한다.

보통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질때는 사인을 주고 받는다. 내가 어디로 던질께, 안돼, 그럼 여기로 이 구질로 던질께. 그래 좋아. 이렇게 약속된 사인을 주고 받은 후 공을 던지면, 포수는 아름답게 받아준다. 그 아름다운 프로세스를 통해 타자를 삼진 아웃시킨다. 내야 땅볼도 좋지. 그렇게 문제를 해결한다. 이게 제대로 된 던지기다. 

앤더슨은 어떤 공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와 어떤 구질로 던지겠다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번 공은 타자를 낮은 땅볼로 유도하기 위한 공' 이라는 목적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없었다. 그냥 허공에 던지고, 알아서 받으라고 했다. 공은 포수 뒤로 흐르는 폭투가 된다.


이럴 때, 좋은 문화의 회사에서 일하는 똘똘한 주니어라면 곧바로 물어본다.

"이해가 잘 안갑니다. 그래서 정확히 제가 해야 할 일이 뭔가요?"

하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은 곳이라면,

주니어는 일단 '네'라고 한다. ('넵' 이 맞을까. '넵넵' 일수도.)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서 한숨을 10번 정도 쉬고, 고민을 시작한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도대체 뭘 해야 하는거지. (여기서 조직 문화의 중요성이 다시한번 드러난다. 문화가 반드시 좋아야한다. 궁금한 걸 거리낌없이 물어볼 수 있는 문화. 쉽게 만들 수 없는 바로 그 문화가, '공을 똑바로 던져주세요' 라고 말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앤더슨의 폭투가 실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명확한 업무지시


이게 참 어렵다. 앤더슨은 명확하게 뭘 해야하고 왜 해야하며, 우리는 그걸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럴 능력이 없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앤더슨의 경우, 높은 확률로 업무 지시 내용을 뒤엎을 수도 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답답하네." 라고 이야기하며, 역정을 낼 가능성도 있다. 자기는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왜 주니어들이 제대로 따라와 주지 않지? 나도 능력있는 후배들과 일하고 싶다.. 며 오히려 자기 연민에 빠질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하는지만 명확하게 가이드해줘도, 많은 주니어들은 재미있게 일 할 수 있다. 아니, 요새 주니어들은 우리보다 훨씬 똑똑하다. 무엇을 왜 해야하는지만 잘 설명해준다면, '어떻게'는 스스로 본인만의 방법을 찾아 해결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제대로 된 동기 부여가 추가된다면, 그들은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며 하루하루 성장해 슈퍼맨이 되어, 더 좋은 곳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좋은 선배가 되어 주었을까?

어떻게 하면 스마트한 업무 협업을 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책을 아무리 읽어도 완벽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연습하는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그러다보면, 언젠간 주니어들과 열심히, 신나게 사인을 주고 받으며 아름다운 공을 던질 수 있겠지. 나도 그렇게 성장하면, 우리 팀은 10승, 20승을 달려 결국 우승할 수 있으리라.


오늘도 앤더슨과 일하는 많은 주니어들은 갈피를 못잡고 헤맨다.

앤더슨은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니어들, 미안합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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