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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Jul 22. 2021

면팀장 되었습니다

휴가신가요?


제주에서의 휴가 첫 날.

나는 렌트한 차에서 운전중이었다.


해가 지고 있다. 불타는 듯한 오렌지 빛 석양이 아름다웠다.

제주의 태양은 서울의 그것과 다른걸까?

옆자리엔 아들이, 뒷좌석엔 아내가 앉아있었다.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라디오에서는 DJ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


핸드폰을 거치대에 올려놓고 내비게이션으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요새는 핸드폰 하나면 어디든 길을 찾을 수 있다. 편리하다.

그 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응? 뭐지.'

사람이 참 신기하다. 촉이라는 게 있다. 나는 초자연 현상을 믿지 않지만 관심은 많다.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즐긴다. 인간이 앞으로 발견할 무한한 가능성에 가슴이 뛰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 메시지에도 무언가 촉이 왔다.

느낌이 좋지 않은.


바로 확인해야 하나?

고민하며 운전하는데 마침 신호에 걸렸다.

카카오톡을 열고 확인했다.

보스가 보낸 메시지였다.

휴가신가요?

나는 휴가 계획을 벌써 예전에 공유했다. 하지만 모를 수 있지, 그는 워낙 바쁘고 관리해야할 조직원이 많으니 이해한다. 바로 답장했다.

네 휴가중입니다. 무슨 일 있으실까요?
아 휴가중이시구나, 그럼 그냥 카톡으로 얘기할께요.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보통은 휴가중이라고 하면, 나중에 대화하자고 하는 게 일반적일텐데. 얼마나 급하길래 메시지로 하자는거지.

최근 일어난 장애건들로 인해, ㅇㅇ님이 운영하시는 팀에 새로운 팀장을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위에서 그렇게 결정이 되었구요. 동의를 얻고자 연락드렸습니다.

뇌가 잠깐 사고를 멈췄다. 문장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아차, 지금 운전중인데 신호는? 다행히 아직 빨간불이다. 신호가 길구나.


조그만 팀을 하나 맡고 있다. 팀원이 한 명일 때 부터 열심히 만들어 온, 그래서 팀원 한 분 한 분이 소중한 조직이다. 나는 우리 팀이 좋다. 훌륭한 분들이 모여, 힘든 일을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새 장애가 몇 차례 있었지만, 인재가 아니었다. 귀책사유도 우리 팀에 있지 않은, 어쩔수 없는 사고에 가까웠다. (고 생각한다.) 최근 성과도 나쁘지 않고 팀 분위기는 여전히 긍정적이다. 다시 극복하고 팀원들 사기를 올리며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새로운 팀장이 온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지금 내가 팀장인데, 나는 어떻게 되는걸까.

ㅇㅇ님은 팀원으로서 새로운 보직을 맡으실꺼구요, 새로운 팀장님과 잘 협업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신호가 곧 바뀔 것 같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미 결정이 된건가요?
네, 매니지먼트 레벨에서 결정은 이미 되었는데, 확인차 연락을 드렸습니다.

무슨 확인을 한다는걸까.내가 그러기 싫다고 하면 그렇게 안되는 걸까. 거부할 수 있는건가.

이건, 이미 통보다. 나는 운나쁘게도, 발버둥치면 더 깊이 빠지는 늪에 발을 들인거다. 추하게 발버둥치지 말자. 그게 우리 팀원분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알겠습니다. 팀이 잘 되는 방향이라면 동의합니다.
네, 이해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가 되세요.

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즐거운 휴가’라.

면팀장 통보를 카카오톡으로 단 5분만에 듣자마자 신호는 기다렸다는듯 파란불로 바뀌었다. 여기 신호는 엄청 길구나. 멍하니 한참을 달렸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불이 난 듯 오렌지빛이다. 내 기분이 어떻든 예쁜건 예쁜거다. 이런 석양을 매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운전을 하면서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럴때는 생각을 해야 한다. 본능이 반응하도록 두면,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다.


호텔로 돌아와 주차를 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사람이 신기한게, 정신은 육체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친다. 생각이 고통스럽다면 반드시 몸에 반응이 온다. 그 날 저녁도 그랬다.

갑자기 열이 났다.

휴가 중인데, 여기는 제주인데, 가장이 이러면 안되는데.

걱정스러운 얼굴의 아내와 아들을 두고 나는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으슬으슬하고 경미한 근육통. 하아, 이렇게 나약해서야 쓰나. 급한대로 근처 약국에서 몸살 약을 사먹었다. 즐거워야 할 휴가는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다음 날도 내리지 않는 열로 하루를 그대로 호텔에서 보냈다. 아내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즐거워야 할 휴가를 이렇게 망치다니. 이토록 약해빠진 정신력이라니.


이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다.(시간 참 빠르네)

당연히 이유가 있었을거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거겠지. 상위 레벨의 의사결정 사유는 반드시 존재할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휴가중에 받은 그런 식의 인사통보도 처음이었거니와, 그 공격에 몸져 누운 나의 나약함에 어이가 없다. 인생을 살면서 여러가지 사건 사고를 겪었고, 앞으로 겪을테지만. 아마 이런 종류의 사고는 처음이어서 그랬을테다. 뭐든지 처음은 놀랍고 당황스러운 법이니까.


문득,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쓰기하라 선수는 철봉을 놓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연습때도 왠지 모르게 몸 움직임이 안좋았다.
지쳤는지도 모른다.
본 경기에서 철봉에서 떨어지다니, 본인에게는 믿지 못할 사건이리라.
인생에는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사람은 악몽에 견디는 법을 배운다.
나 역시 배웠다.
그저 TV로 중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시드니'


나도 그렇게 악몽에 견디는 법을 배우고, 깨달았다.


이후,

조용히 물러나는 태도의 중요함을 느꼈다.
보직 없이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런 상황에서 곁에 있어준 소중한 동료 몇몇을 얻었다.

반대로 회사 내 인간관계의 덧없음을 깨달은 것은 물론이다.

덕분에 크게 한 걸음 앞으로, 성장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다시 겪고 싶지 않은 휴가중 면팀장 통보였다.

그 후로 이 메시지만 보면 당시 운전석에서 바라본 제주의 아름다운 노을이 떠오른다.


'휴가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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