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 Aug 28. 2021

추상화입니까? 기획서입니까?


구글 메신저 알림창이 반짝거린다.

안봐도 비디오. 저건 팀장이 올린 메시지다.

"ㅇㅇ 프로젝트 추진안 관련으로 공감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내일 오전 긴급하게 회의를 해서 의견을 모아봅시다."

내일 오전이라면 9시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는 보통 출근하자마자 회의를 즐긴다.


ㅇㅇ 프로젝트는 회사가 사활을 걸고 진행하는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작업이다.

여기저기 파편화 되어있는 정보들을 한 곳에 모아, 제공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계획만 가지고 있다.

누구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왜' , '무엇을' , '어떻게' 하겠다는 세부 계획이나 태스크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침 8:55분, 모두 미리 구글 meet 화상회의 창에 모여 팀장을 기다린다.

8:59분. 팀장 입장.

팀장 : "자, 제가 보기에 지금 ㅇㅇ 프로젝트가 진행이 더디고, 후속 방향성에 대한 생각이 다들 다른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같이 좀 해보죠. 내가 보기에는 말이죠.. ~~ ~~~ ~~~~ "


이야기가 이어진다.

보통은 이렇게 30분 정도 혼자 떠들고, "자 어떻게 생각들 하세요?" 라고 묻는게 기본적인 절차다. 기분이 좋거나 하면 한 시간까지 혼자 떠들기도 한다. 재택 근무의 장점은 저렇게 떠드는 모습을 눈 앞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창을 열어놓고 멍하니 화면에 띄워놓은 장표를 바라본다. 하지만 딴 짓은 곤란하다. 이러다가 갑자기 지목해서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컨셉에 대한 내용이다.

팀장의 이야기는 60분 내내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다리를 짓는다' 라고 생각해보자.


팀장 : "자, 여러분. 우리가 다리를 지을꺼잖아요. 다리는 말이죠 튼튼해야 합니다. 아시죠? 왜 튼튼해야 하냐면 차량들이 그 위를 지나가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콘크리트로 지어야겠죠? 콘크리트는 콘크리트 전문 회사에 전화해서 받아오세요. 공사 현장 인부들은 좋은 사람으로 찾아보시고, 임금은 최대한 적당하게. 손익은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다리는 미적으로도 아름다워야 해요. 색상은 회색이 좋겠네요. 왜냐면 다리니까요. 다리가 빨간색이면 좀 그렇잖아요? 자, 멋있는 다리를 만드세요."


팀원1 : "저.. 다리가 필요하다는 마을의 요청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아직 다리 건설 허가도 못받았고요.. 자재부터 인력까지, 여기는 오지라서 아무도 지원하지 않고, 수급이 불가능합니다. 옆 도시에서는 무장 테러범들이 시민들을 공격하고 약탈하고 있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희가 현재 진행중인 교각 건설현장이 17개입니다. 지원 인력도 부족한 형편이구요. 저희팀의 교각 건설 지원은 10개 정도가 병행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보다는 기존 현장을 사고 없이 잘 마무리하는 걸 우선으로 진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


팀장 : "자자, 우리 회사가 세계 최고의 교각 건설 회사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리 건설이 필수에요. 윗선에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이니 딴 소리 말고. 콘크리트를 잘 받아와서, 콘크리트는 18번 고속도로를 통해서 가져오세요. 거기가 차가 안밀리더라고. 주말에 내가 골프 라운딩 가면서 보니까 그래. 아무튼, 화려하면서도 튼튼하게! 알겠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참 열심히도 한다.

팀원들은 정신이 멍해지고, 허탈하다. 이젠 화도 안난다.


팀장 : "자,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다들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고, 실장님께 보고해야 하니까. 오늘 내용을 장표로 준비해주세요."


팀원2 : (meet 화면을 공유받고 파워포인트를 연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다리를 짓는다'" 라고 이렇게, 이렇게 작성하겠습니다."


팀장 : "아니~~~~ 그게 아니죠. 답답하네.. 자 봐요"


팀장은 직접 파워포인트를 연다. 그리고 갑자기 다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팀장 : "이렇게 이렇게 응? 이런 다리를 말야. 콘크리트로 말야. 회색으로, 튼튼한 사람 한 300명쯤 데려와서 말야. 이렇게 만들라구요."

본인이 직접 지우고 그리고 설명하고 지우고 그리고 또 설명하고 다시 30분. 벌써 두 시간이 넘어간다. (팀장이 상세 기획을 하는건가?)


팀원2 : "네 알겠습니다."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팀장 : "자 그럼, 제가 그린 그림이랑 지금까지 내용 종합해서 장표 준비해주세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실장님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이런 회의만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상세 계획이나, 문제 해결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교각 건설을 위해 사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인데, 팀장은 그 문제의 해결은 모른척하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건지,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는건지 모르겠다.

문서를 작성하고 수정하고 보고하고 다시 수정하고 를 몇 주간 또 반복한다.(그 사이 이런 회의는 몇 차례 더 이어진다.)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상위 기획' 문서가 또 하나 탄생한다. 문서 작성에 들어가는 리소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고급 인력들을 데려다 놓고 이해도 안가는 파워포인트 문서나 작성하게 만들다니, 이건 배임에 해당하는 해사행위 아닌가?


보통 이런 모양이다.


ㅇㅇ 건설, △△교각 건설 기획안



이런 식으로 실체도 없는 뜬구름 잡는 문서만 수십, 수백장이 회사 안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아무도 책임지거나 일정이나 상세 태스크를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냥 보고하면 된다. 그럼 뭔가 일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교통량에 따른 타당성은 맞는지, 설계는 어떻게, 기초는 어떻게, 구조는 어떻게, 인력 수급은 어떻게, 자재는 어떻게, 그에 따른 재무 계획은 어떻게 등등. 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관심가질 시간이 없다. 현재 진행중인 운영 건만 해도 허덕인다. 팀장이 지시한 문서 만들 시간은 부족하고 빡빡하다.


팀장은 관심도 없고, 멋지고 예쁘게만 외친다.

왜냐면,

그는 2년짜리 임원이기 때문이다. 단기 성과에 목을 맨다. 3년 이상 소요되는 실제 교각 건설에는 관심이 없다. 열심히 윗선에 광을 팔아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거 이런거 멋진거 할께요!' , '다리도 짓고, 빌딩도 높은거 몇개 올릴꺼에요!' 라고 윗선에 보고만 하면 되기 때문에, 실제 진행은 아무 관심도 없고. (솔직히 업무 관련 지식도 없다.)

팀원의 성장? 커리어 패스? 어려움? 전혀 안중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 오로지 내 계약 연장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다.

매일 자리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 스포츠 중계 및 연예 기사를 훑어보는게 주된 일이지만 윗선에 일하는 척 올리는 주간보고와 장표는 중요하다. (내가 작성하는 건 아니니까, 뭐) 아랫사람들 한테 시키면 된다.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자 오늘은 또 뭘 조사하고 기획해서 올리라고 해볼까나?



이렇게 '상위 기획서'만 난무하는 회사가 탄생하고, 굴러간다.


피카소, '가슴을 감싸 안은 여인'


위, 피카소의 그림처럼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수 없는,

(마치 추상화 같은) '상위 기획서'가 유령처럼 회사를 떠돈다.

단지 느낄 뿐이다.

'아, 뭔가 멋있는 걸 하긴 하려는 모양이군.'

상무,전무 등 단기 임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내놓은 그럴듯한 기획서를 펼쳐놓고,

'아, 뭔가 회사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군.'

경영진은 저 피카소의 그림을 팔짱끼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역시, 나는 역시 감각이 있어.' 라고 생각하며.


흔히 요새 말하는 네카라쿠배 급의 회사만 해도 이런식의 기획서가 날아다니진 않는다. 이 정도는 최초 컨셉회의 때 한번 언급되고 말지. 후속 회의에서는 각론에 대한 상세 태스크 기획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경영진부터 실무진까지 무엇을 하고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파악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리소스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임원이나 팀장급이 일을 진행하면 보통 저런식으로 망해간다.

시골 자그마한 동네에 구멍가게 하나 열어놓고, 자체 PB상품 출시에 대한 기획을 하자는 꼴이다.

주로,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서 저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인맥으로 라인으로 끌어온 사람들이 윗선에 주르르 앉아있으면서 '광을 팔고' 2년 후에는 집으로 간다. '상위 기획서1'은 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상위 기획서2'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렇게 정체모를 조직들이 생겨나고 또 사라져간다. (대기업에서 왜 그렇게 조직 개편이 잦은지 이해가 간다.)


현재 대한민국의 많은 대기업들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외치고 또 외쳐도 실행이 불가능한 이유다.

(저런 임원들이 또 어디서 책 한권 읽고 와서, '애자일'한다고 'OKR'한다고 난리를 친다. 왜? 윗선에 보고해야 하니까, 우리 이렇게 한다고 광을 팔아야 하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일하고, 소통할 것인지 나는 예측할 수 없다.


왜 우리는 넷플릭스나 테슬라 같은 기업이 나오지 않는지 궁금하다면,

실제로 대기업들의 IT부서 회의를 들어와 보시라.

저 위와 같은 회의를 하루에도 몇번씩 경험하면서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들어오지 마시라.

더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곳에 관심을 갖고 리소스를 투자하시길 바란다.


우리의 인생은 짧고,

여러분들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다들, 건투를 빕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면팀장 되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