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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Sep 01. 2021

기획서는 칼이 아닌데 누굴 공격해?


"모두 모여보세요! 옆 팀인 ㅇㅇ팀에서 추진중인 △ 프로젝트가 우리팀 때문에 진행이 안되고 있다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팀장이 씩씩대며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언성을 높인다.

"그럴리가요, 그 프로젝트는 ㅇㅇ팀 내부 인력 이슈로 진행이 어려워 난항을 겪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장님 주관 회의에서, ㅇㅇ팀에서 우리를 저런 식으로 공격했단 말입니다! 당장 반박 보고서를 작성해서 오늘 중으로 올리세요! ㅇㅇ팀을 공격할 만한 근거가 되는 자료도 모두 같이 올리세요!"


뭐, 흔한 광경이다.

회의에서 신나게 깨지고 돌아와서, '방어용 보고서'를 만들어 달란다. 내가 털렸으니, 복수를 해야 한단다.

자, 이제 장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팀은 ㅇㅇ팀의 △△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라는 방어 보고서에,

<오히려, ㅇㅇ팀이 우리팀의 □ 프로젝트를 도와주지 않아, 회사의 매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라는 역공격 보고서 까지.

반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수치와 도표를 첨부해야 한다. 그래야 사장님이 우리편을 들어주고, 그것은 우리팀(팀장)의 승리로 이어진다.


업무는 올 스톱이다. 

모두 보고서 작성에 매달린다.

사일로가 심각한 대기업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여기는 IT 부서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다. 2년짜리 계약직인 상무,전무 등 임원들은 본인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기 때문에, 이 처럼 공격 당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공격당하는 모습을 본 사장이 혹여나 자신을 직위해제 시키지 않을까, 재계약에서 탈락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잠을 설친다. 

당장 반박해야 하고, 즉시 보복해야 한다.


이런 밥그릇 싸움은, 대기업의 일상과도 같다.

기획서를 가지고 타 팀을 때리고 공격하는 정글의 법칙. 

분명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같은 회사의 임직원인데, 정치판의 깡패들처럼 칼로 찌르고, 방망이로 때린다. 단, 여기서는 칼이 기획서고, 방망이가 프리젠테이션이다. 


이런 충돌과 갈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새로운 아이디어와 번뜩이는 재치로 이어져 회사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카카오'였나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플랫폼사에는 '신뢰' , '충돌' 이라는 슬로건이 있다고 한다. 서로 믿음을 기반으로 치열하게 충돌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말한다. 좋은 '충돌'이다. 누군가 물을 깊게 휘저어야 바닥의 침전물이 올라와 정수가 가능해지듯, 조직 내에 어느 정도의 충격은 필요하다. 고이면 썩는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처럼 단순히 임원의 자리 보전을 위한 밥그릇 싸움 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전투가 이어지고, 팀원들은 조용히 아무말 없이 자판을 두드릴 뿐이다.

자, 오늘도 공격과 방어를 위한 덧없는 보고서 작성이 밤 늦게까지 이어진다. 

이 리소스 투입의 가치는 '팀장의 승리'로 판단해야 하는걸까? 그렇다면 '패배'는 자원낭비인건가? '패배'의 기준은 무엇인가? 팀장의 불쾌한 감정?

잘 모르겠다.


 OECD 노동생산성 현황


노동 생산성이 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냥 대충 이해하는 수준이다. 

위의 표를 보고, '한국은 일은 열심히, 많이 하는데 성과가 없다.'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우리는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서 야근을 해도 회사는 항상 위기상황이라는데, 도대체 유럽은 어떻게 한달씩 휴가를 다녀와도 회사가 멀쩡히 굴러가는 걸까.


답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나라의 수 많은 직장인들이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제발 필요한 일만 합시다.


저는 그럼 '방어용 리포트'를 작성하러 갑니다. 

내일 오전까지 제출이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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