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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을 삼인칭으로 호칭하는 자를 멀리하라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자들

by 이서


본능적으로 가까이하기 꺼려지는 사람들이 있다. 나뿐만이 아닐 거다. 이 글을 읽는 누구나 ‘피하고 싶은 사람‘의 종류를 개인적으로 분류하여 간직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말이다.


각자의 취향과 성격이 다르기에 그 기준은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다. 사적일지라도, 각자의 기준은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멀리해야 할 사람’의 기준을 명확히 하면, 큰 불편이나 피곤, 불행한 사태를 미리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을 꺼려하는가’는 꾸준히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어찌 보면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피해야 할 인간들의 빅데이터를 커스터마이징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생존의 관점에서 말이다.


‘관상’도 결국 그런 통계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오랜 세월 역사를 이어가며 어떤 얼굴이 어떤 특질을 가지고 있는지 쌓아놓은 빅데이터인 것이다. ‘관상’을 통한 분류가 반드시 100% 정답은 아니겠지만, 참고할만한 자료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나에게도 관상과 같은 ‘가까이하면 안 될 사람’의 기준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것이다.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부르는 자’


인생을 걸쳐서 만난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자’들이 많다. 보통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피해야 할’ 카테고리에 넣어놓았다.



<초중고 학창 시절>

아침 조회시간.

학교는 아직 미성년자에 불과한 전교생을 운동장 뙤약볕에 줄지어 세워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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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지치고 힘들 즈음, 교장은 천천히 교장실에서 걸어 나와 연단에 오른다.

그는 마이크를 잡는다. '엣헴. 아아! 마이크테스트!'

교장은 말 끝마다 이 말을 반복했다. “교장선생님이 한 말을 꼭 명심하세요!”


‘제가 한 말을 기억하길 바랍니다.’라고 하면 될걸.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영유아기 시절 "영수는 배고파! 배고프단 말이야!"라고 말하던 버릇이 성인이 된 이후까지 남아있어서? 아니면 혹시 학생들이, 본인이 교장이란 걸 모를까 봐 막 알려주고 싶고 그런 걸까. 차라리 ‘교장’이라고 쓴 커다란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군복무 시절>

최전방이었던 내 복무부대의 점호시간은 꽤 엄격했다.

나는 점호시간마다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피곤하고 졸려서 얼른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중대장은 점호시간마다 사병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떠드는 걸 좋아했다. 어떤 날은 30분 넘게도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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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에게 실망할 일이 많았나 보다. 그는 점호시간마다 반복적으로 말했다. “중대장은 너희에게 매우 실망했다.” 근데 왜 ‘나는 여러분에게 실망했다.’라든가 ‘본인은 실망했다.’라고 하지 않고 ‘중대장은’이라고 하는 걸까. 우리가 혹시 그를 '중대장'이 아니라 '대대장'이라고 오해할까 봐 그랬던 걸까. 아니면, 배가 고팠던 영수가 어른이 되어 중대장이 된 걸까? 왜 본인을 타자화하는지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직장인 시절>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다신 그런 종류의 사람을 만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신임 본부장의 지시로 본부 전체가 회의실에 모인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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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앞 연단에 올라 이렇게 입을 열었다. “본부장은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노트북을 열고 다른 일을 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이럴 수가. 또?!! 나는 잠시 헷갈렸다. 내 착각일 수도 있잖는가. 지금 말하는 사람이 본부장인데? 혹시 옆 본부의 본부장을 이야기하는 건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부르는 거였다. 아... 나는 회사에서도 만나고 말았구나. 배가 고팠던 영수를. 그는 일장연설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본부장은 늘 열려있어요. 언제든 의견 환영합니다.”



‘나는’ 혹은 ‘저는’이라고 말하면 될 상황에서 직책으로 본인을 호칭하며 권위를 올려치는 기이한 행태.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을 굴복 혹은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본부의 방향이니 잔소리 말고 따르라는.


위상강화를 위한 자기 연출이라고 봐도 되겠지.


스스로의 역량으로 충분한 리스펙을 얻을 수 없으니 ‘얘들이 내 말 무시하면 어쩌지?‘라고 지레 겁먹는다. 그래서 직책이나 직급으로 본인을 표현,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강조한다. 어찌 보면 안타깝고 짠하다. 낮은 자존감의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 이후에도 회사에서 종종 만나곤 한다.

직책으로 본인을 부르는 이상한 리더들 말이다.


궁금하다. 그들이 자리를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면, 스스로를 어떻게 부를까. 혹시 어떻게든 감투를 만들어서라도 호칭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작은 사교 모임이라도 억지로 만들어 스스로 회장자리에 앉고, ‘회장은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이지. 그래서 다들 그렇게 자리나 권력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재미있는 회사생활이다.


혹시 여러분도 만난 적이 있나요.

본인을 타자화하는 기인을.

만났다면 부디 조심하시길.


모두,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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