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년생 시절이었다. 2,3년 차쯤 되었나.
당시에 나에겐 업무 선배가 있었다.
그를 K라고 부르자.
K와 나는 다양한 일을 했는데, 그중에는 '안내장 발송‘도 있었다. 고객에게 나가는 실물(종이) 안내장이었다. (당시에는 우편으로 발송되는 종이 안내장이 꽤 많았다.)
우리는 이런저런 여러 업무별 각종 데이터를 모아 가공, 안내장에 프린트할 데이터를 만들어 인쇄 업체에 넘긴다. 인쇄 업체는 안내장을 출력, 발송하여 업무는 마무리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그날.
나는 K와 함께 철야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밤새 안내장 데이터를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데이터를 말아서 넘긴다'라고 표현했다.)
작업을 돌려놓고 집에 가서 쉬고, 다음날 아침에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배치 작업이란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작업이 돌다 에러가 나면, 인풋 파일을 열어서 문제가 되는 데이터를 수정 후 재구동해야 했기에, 퇴근은 할 수 없었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연말이라 작업해야 할 안내장 종류가 많았다.
그래서 한 종류 데이터 작업이 끝나면 인쇄 업체로 파일을 보내고, 다음 작업을 돌리고, 그렇게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새벽 2시쯤이었다. 창문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모두 퇴근해서 조용한, 어쩐지 따뜻한 사무실의 밤.
시스템 로그를 보면 대충 남은 작업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
지금 배치 작업이 도는 속도와 남은 안내장의 종류로 예상해 보면, 앞으로 3~4시간 정도 더 작업하면 인쇄업체로 데이터를 보내는 작업은 대부분 마무리될 것 같았다. '아침엔 집에 갈 수 있겠군.'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이라 비몽사몽.
나는 로그가 찍히는 화면의 모니터링 시스템을 보고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K의 비명이 들렸다.
"어?!!?!??!!!"
IT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개발자든 누구든 '어?'라고 외치면 다들 긴장한다.
장애가 발생했다는 신호로 여겨지기도 하고, 무언가 긴급히 조치가 필요한 사고가 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시그널.
나는 긴장해서 물어봤다.
"왜 그러세요?"
K의 얼굴이 사색이다.
"야, 큰일 났다. 데이터 잘못 나갔다."
인쇄 업체에 이미 전달된 한 종류의 안내장 데이터가 잘못 구성된 것이었다.
나는 후다닥 전화기를 집어 들고 인쇄 업체에 얼른 전화했다.
"혹시 ㅇㅇ안내장 인쇄 시작했나요?!!?!!"
"아~ ㅇㅇ안내장~ 그건 기계 벌써 다 돌았어요~~ 인쇄 끝났고, 박스 포장까지 거의 다 끝났어요~"
이런.
K는 사색이 되었다. 다음 통화부터는 K가 직접 했는데, 나는 옆에서 주워듣기만 했다.
재인쇄하려면 시간이 얼마가 더 걸리고, 무엇보다 비용이 추가되는데 수천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미 수십 년 전 일이라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큰 액수였다. 억은 아니었고 천 단위.
K는 즉시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30분도 안되어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새벽에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무슨 일이에요?"
K는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팀장은 가만히 듣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는 성질을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작업에 대해선 일체 묻지 않았다.
왜 잘못했는지, 누가 잘못한 건지 따져 묻지도 않았다.
심지어 무슨 안내장인지도 묻지 않았다.
팀장은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 부분을 말씀해 주세요. 해결해 보겠습니다."
팀장은 윗선에 보고해서 추가로 필요한 수천만 원에 대한 승인을 바로 얻어냈고,
불만을 토로하는 인쇄업체와 잘 이야기해, 재인쇄할 수 있도록 문제를 풀어주었다.
‘장애보고’나 ‘긴급배포승인’ 같은 형식적인 절차들도 생략하도록 커버해 주었다.
우리에게는
"걱정 마시고, 데이터 재구성만 잘 부탁드려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K와 나는 팀장님이 감사해서, 고마워서, 미안해서, 알아서 더 꼼꼼히 열심히 작업했다.
결국 일은 잘 해결되었다.
그날 새벽.
팀장이 우리에게 성질을 내며, 작업이 뭔지 설명하라고 다그치고, 누가, 왜 사고를 쳤는지 이유를 대라고 쏘아붙이고, 우리 옆에 죽치고 서서 언제까지 되는 거냐며 잔소리와 닦달을 해댔으면 아마 또 다른 문제가 터졌을 거다.
팀장은 잘 부탁한다고 하고, 자기가 해결할 문제만 처리하며, 우리 자리 쪽으론 아예 오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 배웠다.
마이크로매니징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믿고 맡겨주면 더 열심히 하고 싶다는 걸.
다 큰 성인이고 프로페셔널이라면 그저 위임하고 맡기면 된다. 신뢰를 주면 알아서 노력한다. 그것이 진짜 매니지먼트이고 관리의 기술이다. 마이크로매니징하는 리더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팀원은 없다. 꼬치꼬치 신경 쓰고 세세하게 참견하고 간섭하며 일일이 지시하는 리더 아래에서, 열심히 진심을 다해 일하는 팀원은 없다.
마이크로매니저의 주변에는 “물론 됩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요~"라며 딸랑딸랑 번드르르한 듣기 좋은 말만 속삭이는 간신배들이 남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이크로매니징 하면 안 된다.
그저 믿고 맡겨주면 된다.
동이 트는 새벽, 창밖을 보니 눈은 어느새 그쳐있었다.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었음을 팀장에게 보고했다.
그는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뭐 먹고 싶어요? 제가 아침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