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은퇴해야 하는가.
나는 요새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뇌과학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그런 고민을 하게 된다. 뇌의 기능 저하 때문이다.
인간은 노화가 진행되며 육체적으로 퇴화하는데, 뇌도 마찬가지다. 뇌의 기능은 저하되고, 호르몬 생성은 들쑥날쑥해지며, 감정 조절이 힘들어진다.
뉴런은 줄어들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워진다. 이건 개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관절이 상하고, 노안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는 노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 특성상,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 많다. 굳이 나이를 특정하진 않겠다. 나는 그들의 업무 성과와 산출물, 소통방식, 업무 진행 방식, 의사 결정의 수준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뇌의 기능이 퇴화되어 업무적으로도 어려워지는 것이 맞는 듯 하다. 한참을 지켜보니 그렇다. 그들은 감정 조절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건 뇌의 기능과 호르몬 이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급발진하고, 고지식한 신념으로 후배의 말을 무시하고, 직위로 찍어 누르는 행위 등이 모두 그런 결과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때는 말이야’, ‘요즘 친구들은 영…’ 등등의 수준 낮은 멘트도 마찬가지. 충직한 의견 제시나 제안 등을 무시하고, 논리란 없는, 오직 자기 뜻대로만 지시하는 고집 센 당신의 상사를 떠올려보라.
그들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저 뇌가 퇴화하고 고장 났을 뿐이다. 나는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기로 했다.
불행히도, 회사(특히 대기업)의 고위직들은 고연령대가 많다. 차장,부장,상무,전무,부사장,사장 등등 모두 뇌 기능이 퇴화되고 있는 고령층이 대부분이다. 아집에 휩싸여 의사결정 한다거나, 자리보전(생존)을 위해 측은지심도 없이 부하직원들을 찍어 누르는 업무 지시 등 파충류에 가까운 본능적인 행동들이 이런 뇌의 고장과 연관이 있다.
자기들에게 사탕발림 입에 달콤한 말만 하는 딸랑이 낙하산들을 아끼는 이유도 뇌의 고장이 가져온 참사다. 옳은 말을 받아들이고, 개선하고, 발전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판단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반하는 자들을 모두 적'으로 2차원적인 신념을 가진 채, 내편 혹은 적으로 직원들을 판단한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그들이 고위직에서 보수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한, 조직의 개혁은 요원하다.
나도 나이가 많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뇌가 퇴화하고 있다.
나는 20대, 30대의 나보다 덜 똑똑한 것이 확실하다.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믿지 않은지 꽤 되었다.
나는 퇴화하는 뇌의 기능을 어떻게든 부여잡기 위해 노력한다. (제대로 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해본다. 그게 인생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뇌의 하드웨어 자체가 퇴화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데이터, 즉 소프트웨어를 개선하는 것으로서 어느 정도 효율화가 가능하다. 많은, 가치 있는 데이터를 뇌에 집어넣고, 고민하고, 사색하고, 글을 쓰고, 토론하며 하드웨어의 고장으로부터 시스템을 지키고 버텨내려고 노력 중이다.
악착같이 책을 읽고, 걸으며 생각하고, 주기적으로 글을 써서 발행하는 모든 과정이 내 뇌의 퇴화를 막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다. 생존을 위한 트레이닝에 가깝다.
2,30대 시절부터 회사에서 수십 년간 내가 지켜본 많은 고연령 보직자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그들은 깊은 사색을 하지 않았다. 산출물은 오로지 입으로 떠드는 말 뿐이었다.
술이나 마시고, 모여 골프를 치고, 자리보전을 위해 단기성과에 집착하고, 무지성으로 상명하복 했으며, 마이크로매니징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밀실에서 의사결정했다.
그들은 스스로 '데이터'를 쌓아 뇌 속 '소프트웨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퇴화된 하드웨어(뇌)를 업그레이드도 없이 유지한 채, 단지 '오래 일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보직을 차지한 채 젊은 후배들 위에 비이성적으로 군림했다. 자기 자리(권력)를 지키기 위해 본능에 충실한 짐승처럼 행동하며 말이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식과 경륜이 늘고 인격이 높아질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무식이 늘고, 절제하지 않으면 탐욕이 늘며, 성찰하지 않으면 파렴치만 늡니다.
나이는 그냥 먹지만,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전우용, 역사학자-
나는 젊은 조직이야말로 유일하며 필수적인 성장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조직이 늙어 있으면 개혁이나 발전은 어렵다.
물론 어른들 중에도 깨어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주 가끔 있다. 항상 책을 읽고, 사색하며, 원칙에 입각해 업무를 하고, 낙하산을 배척하고, 친분과 상관없이 의사결정하며,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로 후배들을 이끌고 성장을 돕는 그런 고위직들이 가끔, 아주 가끔 보이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깨어있는 보직자들은 그들보다 더 위에 있는 '망가진 뇌'에게 찍혀서 금방 사라지곤 했다. 자기 자리보전에 눈이 뒤집힌 파충류의 뇌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더라. 다들 알다시피 그런 퇴화한 파충류의 뇌들이 회사 보직, 고위직에 쫙 깔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러운 강에 깨끗한 물 한두 방울 떨어뜨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지.
특히 내가 지금 몸답고 있는 IT서비스라는 업의 특성상, 뇌의 상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번뜩이는 재치로 무장하고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해도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IT서비스라는 산업이다. 그런 빠른 속도의 산업군에서, 뇌가 고장 나기 시작한 데다가,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사결정권자로 앉아 사업을 진두지휘 한다면 그 끝은 불 보듯 뻔하다.(현재 한국 대기업의 상황을 보라.)
매일 밤 고급 술집에 모여 비싼 위스키를 같이 마시고, 골프장에 모여 희희낙락하며 쾌락을 좇는 것으로는 인사이트는커녕 IT서비스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 이 치열한 전쟁터 같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는 더더욱 없다. (회사 실적이 하락하니, '더 일찍 출근하라', '주말에도 출근하라', ‘새벽 등산을 하라’는 둥, 최근 뉴스에 나온 대기업들의 의사결정 수준을 보라.)
매일매일 책을 읽고, 사색하고, 토론하고, 충언을 듣고 깨달으려고 노력해도 고장 난 하드웨어의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극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다. 뇌의 퇴화는 시간에 따른 인체의 변화이며, 인간의 숙명이다. 파충류의 뇌로 퇴화한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맞다. 이 어찌 안타깝지 아니한가.
나는 그래서 고민 중이다.
뇌의 퇴화를 막기 위해 얼마나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하는가.
노력해도 안 되는 순간이 분명히 올 텐데, (아니 이미 왔을 텐데) 나는 그 순간을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언제 물러나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