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많은 것이 해결됩니다
덥다.
더우면 걷기에 불편하다.
해가 높이 솟아 뜨거워지기 전에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은 강남역에서 마로니에 공원까지 걸어보자.
11km, 3시간 정도 걸리겠다.
출발.
이른 시간, 인적 드문 강남역대로는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떠오르게 한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람이 없는 도시 한복판은 조용하다.
조용해서 걷기 편안하다.
소음이 없으니 생각을 멈추기도 좋다.
내 걷기의 목적은 생각을 없애는 것.
논현역.
아직은 선선하다.
논현에서 신사 사이에 클럽이 있나 보다. 밤새 음주가무를 즐긴 젊은 남녀들이 이른 아침 길에 가득했다. 발레파킹을 맡긴 차를 기다리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디론가 떠나갔다. 모두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허탈하고 씁쓸한 기분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쾌락의 끝은 허무. 그뿐이다.
신사역.
전기자전거를 저기 던져놓은 사람은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란 걸 할 수는 있을까.
한남대교를 건넌다.
오늘은 저기 저 남산을 건너야 한다.
오늘도 강물은 조용히 흘러간다.
변함이 없다.
한남대교를 건널 때는 자전거 탑승 금지다. 자전거에서 내린 후, 끌고 걸어서 다리를 건너야 한다.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안내가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바닥뿐만 아니라 이렇게 눈에 띄는 안내판으로도 자전거 탑승 금지를 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무개념 자전거족들은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나쁜 말 하고 싶더라. 다리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건너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름인가 보다.
녹음이 짙다.
역사의 현장을 또 지나간다.
한남동 대통령 관저는 비어있을 텐데, 경비가 여전하다.
언제나 반가운 도시 속 벤치.
남산을 넘어간다. 언덕이 제법 가파르다.
숨차다.
남소문터.
서소문처럼 남소문이 이 자리에 있었나 보다. 계곡 모양이 관문 설치에 적절해 보인다. 지금은 문은 없어졌다. 한양에 드나들려면 이곳을 통과했겠지.
국립극장.
지나가다 이 건물이 눈에 띄어서 안으로 들어와 봤다. 부르탈리즘을 표현한 건가 싶기도 하고. 신기했다. 좀 찾아보니 김수근 씨 작품인가 보다. 자유센터.
거대한 노출콘크리트의 곡선 지붕과 늘어선 거대 열주들이 건물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보이게 만든다. 르 코르뷔지에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건축의 시도가 대범하다.
수포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를 세우면서 수표교라 불렸다.
1760년(영조 36)에는 교각에 ‘경진지평’이란 글자를 새겨 네 단계로 물높이를 측정함으로써, 다리 자체가 수량을 측정하는 수중주석표로 발전하였다.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교각 하부를 마름모꼴로 만든 게 흥미롭다.
동대입구역.
동국대학교.
나무에 걸린 연등이 예쁘다.
나도 부처를 좋아한다.
한 때 유행했던 노출 콘크리트(안도 다다오가 열풍을 일으킨)와 코르텐강(녹슨 철)마감 조합이 유명했던 건축물이다. 파주 출판단지에 이 비슷한 건물들이 많다.
유행은 패션부터 건축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구나.
지나가다 묘한 벤치가 있어서 가까이 가봤다. 햇빛이 천장에 뚫린 구멍들을 지나 벽에 글씨를 만들고 있었다. 궁금했다. 가서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니, 이런 글귀가 보였다.
그대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나요.
잠깐 생각하다 자리를 떴다.
평화시장.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청계천을 건넌다.
두루미인가 학인가.
고고하게 서있다.
외롭지 않아 보인다.
멋지다.
광장시장.
앞으로도 구경할 곳이 많구나.
여긴 좀 궁금하다. 나중에 와봐야지.
종로5가 역을 지나.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사람이 없다.
뭔가 행사가 열릴 예정인가 보다. 준비가 한창이다. 아니면 어제 했던 행사의 흔적인 건가. 잘 모르겠다.
분수가 시원하다.
날씨가 좋다.
한적해서 더 좋다.
아침 일찍부터 한참 걸었더니 배고프다.
근처 혜화역 맥도널드에서 맥모닝을 먹었다.
이제 돌아가자.
3시간 조금 넘게 걸었다.
서울은 걸으면 걸을수록 구경거리가 참 많은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매력적이다. 그 깊은 역사를 이해한다면 더 의미 있는 걷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생각 멈추기‘가 내 걷기의 목표라는 것이다.
자기 통제력을 강화하고 감정적 여유를 확보하려면 인지 왜곡을 일으키는 생각들을 줄여야 한다. 부정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생각을 멈추고 싶을 때, 나의 의지로 멈출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고 하드웨어가 노쇠해지면 그게 점점 어려워진다. 수양을 통해 스스로 통제하여, 퇴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오늘도 잘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