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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뮤지컬)를 보다

by 이서


블루스퀘어는 다른 공연장들과 느낌이 좀 다르다.

한남동에 위치한 것만으로도 물론 차별점이 있지만, 그보다 '공연'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한 극장 구성이 훌륭하다.


일반적인 여타 공연장들을 떠올려보면 그 차이점은 명확하다. 보통 다른 대형 공연장들은 커다란 쇼핑몰이나 백화점 근처 혹은 내부에 위치해 있다. 쇼핑이나 음식, 부대시설과 함께 복합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아무래도 수익 때문이겠지. 그에 비해 블루스퀘어는 오롯이 ‘공연’ 자체에 집중된 공간이다.


인터파크시어터가 뮤지컬과 콘서트에 특화된 전용 공간으로 기획·조성한 공연장이기에, 뮤지컬 전용 극장인 인터파크홀과 콘서트 전용 공간인 마스터카드홀 등 목적별로 최적화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아마 당시에 인터파크가 뮤지컬이나 콘서트 티켓 예매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매각되어 지배구조가 바뀌긴 했다.)


덕분에 관객은 공연의 몰입감과 현장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고, 화려한 상업적 요소보다 무대와 객석의 관계, 음향과 조명 같은 공연 본질에 집중하는 구조를 경험할 수 있다. 덕분에 블루스퀘어는 나에게, 단순한 공간을 넘어 공연 예술 그 자체를 경험하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오늘은 뮤지컬 '위키드'를 관람하기 위해 블루스퀘어를 찾았다.


뮤지컬 위키드(Wicked)는 1900년대 초 출간된 소설 '오즈의 마법사'를 바탕으로,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낸 작품이다. 외전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초록 피부 때문에 마녀로 낙인찍힌 엘파바와 인기 많고 빛나는 글린다가 주인공. 두 인물의 우정과 갈등, 그리고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화려한 음악과 무대로 담아냈다. 2003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했으니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작품이다.


이번 한국 공연은 오리지널 팀의 내한으로, 2012년 이후 13년 만이다.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활동하는 오리지널 프로덕션 팀과 배우들이 그대로 와서 공연하는 형태다. 단순한 라이선스 공연이 아닌 본고장의 무대 퀄리티와 감동을 한국 관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 이게 바로 '오리지널 내한'이지.


공연장 근처는 '위키드' 관련 홍보물들로 다양하게 장식되었다.

점점 기대가 커진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말이지.


공연장 내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3년 만의 오리지널 내한이니, 당연히 관심도는 클 수밖에.


오늘의 캐스팅.

'글린다'의 연기력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있다.


입장하자마자. '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대의 디테일은 구석구석 신경 쓴 티가 많이 났다.

당연하다. 20년 넘게 고치고, 개선한 무대 아니겠는가.

무대 위 거대한 용이 인상 깊다. 혹시 저거 움직이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움직이더라.


공연은 훌륭했다. 솔직히 좀 놀랬다. 이 정도로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오즈의 마법사'를 이렇게 비틀어낼 수 있다니, 인간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다. 해리포터 같기도 하고, 반지의 제왕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재미있는 요소들은 다 넣었는데 그게 또 번잡스럽지 않다.


가장 궁금했던 '글린다' 역 덕분에 많이 웃었다.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뛰어났다. 보통 뮤지컬이라 하면 고음으로 지르는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글린다'역의 '코트니 몬스마' 배우는 '연기'를 잘했다. 손동작이나, 고개의 움직임 등 아주 작은 디테일 표현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뮤지컬도 결국 '연기'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왼쪽이 '코트니 몬스마'


장르가 혹시 '코미디'가 아닌가 할 정도로 개그요소가 많았는데, 그 코드가 나와 맞아서 혼자 엄청 낄낄 대면서 봤다. 물론. 초록마녀가 유색인종의 차별을 표현하고 백인 중심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그들을 억압했는지 우회적으로 그려냈다는 깊은 의미도 있었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일단 재미있어서 좋았다. 함축된 의미가 얼마나 진지한지는 솔직히 부차적이다. 나는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싶지, 공부하러 간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개그, 이 작품 개그가 좋았다.


게다가 미니멀하다. 극 전개에 군더더기가 단 하나도 없다.


많은 여타 뮤지컬들이 화려함과 볼거리를 앞세우다 보니, 이야기 전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장면을 억지로 삽입해 러닝타임을 늘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불필요한 장면들은 일시적으로 시각적 자극을 줄 수는 있지만, 극의 흐름을 끊고 지지부진하게 몰입도를 떨어뜨리며 결국 작품의 메시지를 흐리게 만든다. 관객에게는 피로감을 남기고, 무대는 본질보다 겉모습에 치중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결국 좋은 뮤지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주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본질에 충실했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위키드'는 필요한 대사와 필요한 장면들로만 이루어진 간결하고 알찬 시간을 선사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씬 없이도, 내용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구성했다는 게 감탄 포인트. 수십 년간 이어온 공연만이 가질 수 있는 '끝까지 정제되어 본질만 남은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불필요한 장식과 겉치레를 덜어내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이야기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화려한 볼거리나 자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와 그 안에 담긴 진정성이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오리지널 내한'을 보길 정말 잘했다.


결국, 본질만이 시간을 넘어 오래오래 기억된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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