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게, 흔히 노포라고 불리는 곳에서 먹는 한 끼엔 낭만이 있다. 내가 노포를 찾아다니는 이유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낡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타임머신이 별 건가, 노포에서 느끼는 오묘한 감정 자체가 시간 여행이다.
보통 그런 가게에서 먹는 음식에 화려한 기교는 없다. 하지만,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한결같은 정성과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거기에서 특별한 바이브가 좋은 비누로 닦은 향기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오랜 단골들과 처음 온 손님들이 함께 북적이는 공간 속, 맛을 넘어선 그 가게의 역사와 추억,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범한 일상이 겹쳐지는 따뜻하고 진솔한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노포를 찾아다닌다.
오늘은 광화문의 해장국집 '청진옥'을 찾았다.
1937년부터 영업했단다.
조금 있으면 100년 되겠구나.
여긴 광화문에 올 일이 있으면 자주 찾는다. 십수 년 전, 예전 시청 근처에서 일할 때 어떤 선배가 소개해줬다. 그 이후로도 자주 여러 선배들과 방문해서, 소개해 준 선배가 누군진 정확히 기억 안 난다.
겉모습은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었을지라도, 그 뿌리 깊은 역사와 전통은 맛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가게의 정신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잘 조리된 국물에 더해, 변치 않는 시간의 맛까지 더해져 '이야기가 있는'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
밑반찬은 깍두기. 단출하다.
나왔다.
해장국.
마치 KBS 전통 사극에 나오는 주막 국밥처럼 생긴 이 음식의 본질은 수십 년간 한결같이 지켜온 전통과 장인 정신에 있다. 변함이 없다. 이 가게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시대를 초월하여 이어져 온 깊은 맛의 내력이 응축되어 있다.
국물 맛은 우리가 잘 아는 선지해장국 맛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중앙해장' 해장국과 비슷하다. 거의 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조만간 중앙해장도 포스팅해야겠다.)
큼직한 선지가 잔뜩 들어있다.
건더기를 아끼지 않는 게 분명하다.
밥을 바로 말았다.
긴 설명 필요 없지.
국물에 잘 어울리는, 딱 좋게 지어진 밥이다.
밥을 말아도 국물이 여전히 맑다.
혹시 누가 나 몰래 계속 리필해 주는 건가.
건더기를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다.
다 먹었다.
나는 본인만의 스타일이 있는 사람이 좋다. 잘생기고 외모가 매력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 독특한 분위기와 고집, 개인적인 굳은 소신이 특유의 다정하고 지적인 멋을 만들어내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요새 그런 친구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나도 깨닫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나도 덕분에 매력적인 사람이 될지.
음식도 마찬가지. 오래된 가게, 수십 년의 세월과 전통은 지워지지 않는 스토리를 품고 있다. 그건 그 자체로 이 가게를 묵묵히 지켜온 장인의 고집과 성실함의 증거가 아닐까. 오랜 세월을 거쳐 이야기를 품고, 본인만의 '스타일'이 있는 음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음미하며, 고즈넉하고 진실된 낭만을 충분히 만끽했다. (비 오는 날, 스타벅스에 앉아서, 재즈를 들으며 글을 써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자꾸 낭만 이야기만 하네. 어쩐지, 한물간 노인의 하릴없는 푸념 같군.)
밥을 먹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서점은 못 참지.
한참 책 냄새를 맡았다. 폐 속 깊이 집어넣어 충전했다.
역시 새로운 책들은 계속해서 발간되고 있었다. 이 많은 책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광화문 교보문고 안에 스타벅스가 있다. 나는 테이블 사이 간격을 가장 중요한 '안락 포인트'로 보는데, 요새 어떤 스타벅스는 테이블과 의자를 다닥다닥 잔뜩 욱여넣어서, 카페인지 도떼기시장인지 구분이 안 가는 지점들이 많더라. 그런데, 여기 광화문 교보문고 스타벅스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서점이 주는 포근함과 커피의 따뜻함이 내 뇌에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인지도. 다음에 꼭 다시 와봐야겠다.
서점을 나와 청계천을 걸었다.
한참 정처 없이 걷다가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다 돌아왔다.
이렇게 하루가 간다.
오늘도 잘 먹고, 잘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