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다웃파이어'가 뮤지컬로?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원작 영화를 봤던 게 20년도 넘은 것 같다. 과연 이걸 제대로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쩐지 며칠 전에, 내가 좋아하는 쿠팡플레이의 '직장인들'에서 정상훈 배우가 이런 모습으로 나오더라니. 뮤지컬 홍보였었나보다.
말이 나온 김에, 요새 쿠팡플레이의 '직장인들'. 이 쇼 진짜 재미있다. 추천합니다 정말로. 기다렸다가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관람했는데, 리얼리티와 콩트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과 배우들의 기깔나는 연기로 보는 내내 배를 잡고 웃었다.(대본이 없는 듯?)
‘김원훈' 배우 폼 좋은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백현진' 배우는 이 쇼로 관심을 갖게 되어 요새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연기, 밴드, 그림까지 못하는 게 없는 분이더라.(최근 당뇨 오픈한 것도 신선했다.ㅋㅋㅋ) 재미있습니다 '직장인들'. 다음 시즌을 기다리겠습니다.
아무튼, 이야기가 좀 샜는데.
과연 뮤지컬로 탄생한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건 못 참지.
샤롯데시어터를 찾았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1993년에 개봉하여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이혼 후 세 아이들을 만날 수 없게 된 자유로운(나쁘게 말하면 망나니) 영혼의 아빠 '다니엘'이 백발의 완벽한 가정부 할머니 '미세스 다웃파이어'로 변장하여 가족의 곁을 맴돌며 벌어지는 소동과 감동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뮤지컬 버전은 2019년에 시애틀에서 초연으로 시작했다. 한국은 2022년 세계 최초 라이선스 초연을 성공적으로 올렸다. 브로드웨이 최신작을 웨스트엔드보다 먼저 한국에서 선보인 셈이다. 게다가 논-레플리카(Non-Replica) 버전으로 제작되어 한국 정서에 맞게 유쾌하게 각색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식 개그와 말장난 등이 적재적소에서 관객들을 빵빵 터트린다.
주인공 다니엘(미세스 다웃파이어) 역을 맡은 정상훈 배우의 활약은 단연 눈부셨다. 좀 냉정하게 말해, 뮤지컬 배우로서의 가창력은 정통파라기엔 다소 투박하고 지르는 힘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단점은 'SNL 코리아'를 통해 다져진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과 순발력으로 완벽하게 커버된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단순한 배역이 아니다. 한 인물(다니엘)이 다른 인물(미세스 다웃파이어)로 순간적으로 빠르게 변신하는 스릴과 함께, 여장한 상태에서 남성적인 본성을 억누르고 할머니의 연기를 유지해야 하는, '극한의 연기력'을 요구하는 역할이다. 글로 설명하려니 좀 어려운데, 이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연기력 없이 단순한 가창력만으로는 절대 소화할 수 없는 배역이다.
정상훈 배우는 특유의 유머 감각과 디테일한 표정(몸짓) 연기, 그리고 능수능란한 말투로 이 복잡한 감정선을 능숙하게 오간다. 단순히 웃기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때론 익살스러운 모습 뒤에 숨겨진 아버지 다니엘의 절절한 슬픔과 성장을 미세하게 포착해 냈다. 나는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이것이 SNL의 짬바인 것인가!)
세 자녀 중 첫째인 리디아 역을 맡은 설가은 배우의 연기와 가창력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나는 그녀의 노래 첫 소절을 듣자마자 느꼈다. 굉장한 배우가 되겠구나. 감정을 실어낸 발성이 정확해 전달력이 좋고, 고음이 흔들림 없이 안정적인 데다가 음정이 명확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뮤지컬 '엘리자벳', '마틸다', '오페라의 유령' 등 대형 작품의 주요 아역이었는데, 앞으로 성인 역할로 거듭나면 대단한 활약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응원합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브로드웨이 최신작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국 정서에 맞는 '논-레플리카' 방식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낸 사례다. 대사, 연기, 애드립까지 모두 한국 정서에 맞게 성공적으로 바꿔냈다. 이는 단순히 라이선스를 가져오는 것을 넘어, 한국의 프로덕션 능력,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소화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다웃파이어'라는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부터('잘생기면 다 오빠~에요~'를 듣더니 즉석에서 만든 이름ㅋㅋㅋ), 미국 정서를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었던 다양한 장면과 대사를 한국식으로 각색한 것이 적중했다고 본다. 웃음 포인트는 나라의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 단순히 대사만 한글로 바꿔서 올렸던 라이선스 작품들은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논-레플리카 방식을 참고하면 좋겠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성숙한 저력과 밝은 미래를 확인시켜 준 따뜻하고 성공적인 무대였다. 웃음도 웃음이지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을 수 있었다. 나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공연 내내 실컷 웃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을 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인다. 슬픔 따윈 없어 보인다. 나만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모두 각자의 사연과 슬픔이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고 외롭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
어쩌겠는가.
그저 묵묵히 버티고 열심히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처럼.
그러다 보면 이윽고 하루하루 행복이 가까워지는 거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