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할 때, 자주 야근했다. 하루 종일 회의를 하고 돌아오면 퇴근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메일과 멘션을 확인하고 처리했다. 저녁을 혼자 먹었다. 진행되는 주요 기획 티켓들을 확인하고, 매일매일 스프린트 지표를 추출했다. 그래야 스프린트 상황을 알 수 있고, 결국 제품 문서가 나오니까. 미루면 정기적인 산출물을 낼 수 없다. 정기적인 산출물이 없으면, 입으로만 일하는, 일하는 기분만 내는 '김부장'이 된다. 나는 그렇게 되는 게 두려웠다. 일종의 강박.
야근하면서 가끔, 모두 퇴근한 팀원들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늦은 밤은 센티멘털해지기 좋은 시간대다. 모두 조심합시다.) 팀장이 못나서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일은 계속 쌓여가고, 인원 충원은 요원하다. 장애가 나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다. 정치질은 젬병이라, 맨날 윗선과 싸우고 오는 리더. 게다가 자기 일도 못해서 매일 야근이나 하는 팀장. 나는 차갑게 식은 커피로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했다.
당시에 나는 그렇게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근하는 게 팀장의 최소한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팀원들을 모두 퇴근시키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게 리더라고 생각했다. 능력 없는 리더가 할 수 있는 그나마의 노력이었다. 글로 써놓고 보니 한심하군. 왜 그랬지 대체.
우리는 종종 '열심'을 '오래 앉아 있음'과 동일시하는 이상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근면함이 미덕이었던 농경사회의 가치가 그대로 현대사회로 전승된 것이다. 안타깝다. 하지만 진짜 쿨함과 프로페셔널리즘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감히 말한다. 정해진 시간에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하드 스탑(Hard Stop)'을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쿨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드 스탑은 단순한 칼퇴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업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자기 주도적 삶의 선언이다.
하드 스탑이란 말 그대로 '더 이상의 연장 없이 딱 멈춤'을 의미한다. 업무의 영역에서는 정해진 퇴근 시간이나 약속된 마감 시간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행위다. 이는 불필요한 잔업이나 늘어지는 회의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일과 삶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는 자기 존중의 표현이며 경계 설정의 미학이다. 하드 스탑을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일'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의 주인으로 거듭난다.
하드 스탑의 미덕을 가장 대중적으로 알린 인물은 메타(Meta)의 전 COO인 '셰릴 샌드버그'다. 그녀는 실리콘밸리의 최고 경영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아와 가정을 위해 매일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I walk out of this office every day at 5:30 so I'm home for dinner with my kids at 6:00, and interestingly, I've been doing that since I had kids. I did that when I was at Google, I did that here, and I would say it's not until the last year, two years, that I'm brave enough to talk about it publicly.”
"저는 매일 5시 30분에 이 사무실을 나섭니다. 그래야 6시에 집에 가서 아이들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흥미롭게도 저는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 계속 그렇게 해왔습니다. 구글에 있을 때도 그랬고, 여기(페이스북)에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용기를 낸 것은 불과 지난 1~2년 전이 되어서야였습니다."
그녀의 구체적인 퇴근 시간 공개는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엄청난 파급력을 안겼다. "최고의 리더도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경계를 설정한다"는 메시지는 만연했던 '보여주기식 야근' 문화에 정면으로 일침을 가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당신처럼 특권층이기에 가능한 이야기 아니냐"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대중은 이를 용기 있는 행동이자, 리더가 직접 나서서 건강한 기업 문화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녀는 본인의 하드 스탑에 대한 신념을 밝히기 이전에는 이를 숨기고 몰래 실천했다고 한다. 왜? 자칫 '회사에 헌신적이지 않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5:30에 퇴근하면서 재킷 하나를 의자에 걸어놓는다던가, 책상의 스탠드를 켜놓고, 일부러 다른 빌딩에서 오후 늦게 회의를 잡는 등 일찍 퇴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게다가, 일부러 새벽 시간에 이메일이 발송되도록 예약을 걸어놓고 마치 새벽에도 일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가장 진보적인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 리더가 이 정도였으니, '야근해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하드 스탑을 실천하는 사람이 쿨한 이유는 그 행위 자체가 높은 효율성과 자기 통제력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첫째, 하드 스탑은 집중력을 강제한다. '5시까지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명확한 마감 시간은 업무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시간제한이 없으면 인간은 일을 늘리는 경향이 있지만, 하드 스탑은 '파킨슨의 법칙'을 깨부수는 강력한 촉진제가 된다. 쿨한 사람은 일을 늘리지 않고, 주어진 시간에 끝낸다.
둘째, 하드 스탑은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 업무 파트너나 팀원들은 내가 언제 자리에 없을지 정확히 알기 때문에, 불필요한 저녁 약속이나 긴급하지 않은 요청을 사전에 자제한다. 이는 곧 타인의 시간까지 존중하는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이어진다.
셋째, 하드 스탑은 창의성을 위한 연료를 채운다. 일터 밖에서 보내는 질 좋은 휴식, 취미, 가족과의 시간은 업무에 필요한 새로운 시각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쉼이 없는 업무는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라 곧 고갈될 배터리일 뿐이다.
하드 스탑이 진정한 미덕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보다 조직 문화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핵심은 바로 '눈치 보지 않는 문화'의 정착이다. 아무리 개인이 5시 정각에 퇴근하고 싶어도, 상사가 곁눈질하고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아있다면 하드 스탑은 '배짱 좋은' 혹은 '무책임한' 행동으로 낙인찍히기 쉽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리더십이다.
리더가 솔선수범하여 "나는 오늘 6시에 하드 스탑 할 테니, 여러분도 업무를 마무리하고 정시에 퇴근하세요"라고 공표하고 실제로 자리를 비워야 한다. 리더가 먼저 '눈치 문화'를 무시하고 쿨하게 경계를 설정할 때, 팀원들도 비로소 죄책감 없이 자신의 하드 스탑을 선언할 수 있게 된다.
건강한 조직은 구성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리더의 용기 있는 퇴근에서부터 시작된다. 리더가 "일찍 퇴근들 하세요"라고 말해놓고, 밤늦은 시간까지 슬랙을 보내면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야근하는 리더는 무쓸모다. 밤늦게 연락하는 리더는 최악이다. 하드 스탑은 결국, 능력 있는 개인이 스스로를 존중하고, 리더가 그 존중을 뒷받침하는 성숙한 조직 문화의 상징이다.
당신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드 스탑?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