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FJ 여행기

군산 여행, 가장 조용한 겨울을 걷는 일 1

황석영 신작 '할매' 속 팽나무를 찾아 떠난 여정

by 이서


황석영 작가의 신간 ‘할매’를 읽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긴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군산 하제마을에서 6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낸 팽나무가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황석영 작가는 그 거대한 나무를 친근하게 ‘할매’라 불렀다.


실제로 존재하는 나무라고 한다.(위 책 표지 속의 나무다.) 문득 그 나무가 궁금해졌다. 어떤 풍파를 견뎠기에 600년이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혹시 그 나무 앞에 서면, 나도 어떤 작은 깨달음 하나쯤은 얻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그래. 할매를 보러 가자.

할매를 만나러 군산으로 간다.


기차는 없고 버스뿐이다. 사람이 없을 때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른 새벽 표를 끊었다. 고속버터미널에서 새벽 버스를 탔다.


출발하고 한참을 달렸지만, 차창 밖은 여전히 해가 뜨지 않아 어둡다. 그나저나 겨울의 버스는 기차와 달리 히터 열기로 실내가 바짝 말라 있다. 목이 칼칼해질 정도로 건조한 공기에 숨이 막힌다. 다음 여행에는 마스크를 꼭 챙겨야겠다.


군산에 도착했다. 늘 낯선 도시에 발을 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설렘이 좋다. 중독적이다. 날씨가 좋구나. 공기는 차갑고 상쾌하다.


목적지인 하제마을까지는 여기서 다시 2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2.4km 정도, 꽤 긴 거리를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다.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내가 아는 버스 정류장 모양이랑 달라서 좀 헤맸다.


좀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랐다. 버스 실내 모습에서 예전 시외버스 특유의 투박하고 정겨운 냄새가 난다. 도심을 벗어나자 창밖 풍경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신하제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나뿐이었다. 주변엔 건물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추수가 끝난 빈 논만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다. 순간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당혹감이 스쳤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혹시 하제마을 팽나무를 보러 가실 분들은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타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다. 여기 대중교통은 여행자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구나.


걸어보자. 지도상으로는 40분 정도면 닿을 거리다.


아스팔트 위로 이런 길이 끝없이 계속된다. 40분 넘게 걷는 동안, 길 위에서 사람 그림자 하나 마주치지 못했다. 내 발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린다. 이어폰이 필요 없는 눈과 귀가 정화되는 길이다.


드디어 도착했다. 저 멀리,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600년 하제마을 팽나무가 보인다. 책 속에서 상상만 했던 그 나무.


'할매'를 드디어 만났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관광객은커녕 관리인조차 없다. 오로지 600살 먹은 할매 나무와 나, 둘뿐이다. 나무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긴 시간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며 할매는 얼마나 많은 만남과 이별을 보았을까.


나무 앞에 덩그러니 놓인 하나뿐인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겨울 햇볕을 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 소리, 이름 모를 새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완벽하게 한적한 순간이 얼마 만이었던가. 고요함이 주는 위로가 바로 이런 건가 싶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할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나저나 돌아갈 길이 막막하다. 네이버지도를 열었지만, 돌아가는 시내버스는 모두 ‘도착 예정 정보 없음’ (! 배차 간격이 긴 노선)이라는 정보만 떴다. 시골 버스의 위엄이다. 일단 아까 내렸던 신하제까지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한두 시간 정거장에 앉아서 버스가 올 때까지 책이나 읽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오는 길에는 새가 참 많았다. 도시의 소음 대신 들려오는 새소리가 좋다. 그래서 이어폰을 꺼내지 않았다. 자연이 들려주는 배경음악을 들으며 길을 걸으니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다.


걷던 중간에 반대 방향으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혹시나 해서 쳐다봤는데, 기사님이 나를 발견하더니 손짓을 하신다. 저쪽으로 건너오라는 신호였다. 알고 보니 신하제에서 회차하는 버스였다. 기사님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나는 길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따뜻한 버스 안에서 편하게 터미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군산에 온 김에 올라가는 버스 타기 전에 여기저기 둘러보자.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많이 보아왔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누가 인생작을 물어보면 꼭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답했었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과장되지 않은 연출, 완벽한 시나리오까지. 신파로 흐르지 않는 절제미는 미니멀리즘 그 자체였다. 감히 말하건대, 한국 멜로는 여전히 '8월의 크리스마스'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군산에 바로 그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장이 있다. '초원사진관'을 찾았다.


사진관 옆에는 여주인공 다림이가 타고 다녔던 주차단속 차량이 세워져 있다. 추억의 티코다. 물론 전시를 위해 만든 레플리카겠지만, 그 시절 감성을 되살리기엔 충분하다.


사진관은 이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내부는 영화 속 소품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아날로그 감성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옛날 생각이 난다.


위 소파 자리는, 바로 이 유명한 사진 속 장면을 촬영한 자리다. 한석규가 연기한 정원이 심은하(다림) 쪽으로 선풍기 머리를 살짝 돌려주던 그 순간이다. 말 한마디 없이도 사랑을 표현했던, 극도로 자제한 섬세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원과 다림이 나란히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사진관 앞의 그 큰 나무는 사라진 것 같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


슬슬 출출하다. 군산에 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빵집, 이성당으로 향했다. 아이고, 역시 대기 줄이 길다. 하지만 맛있는 빵을 위해서라면 기다려야지. 줄을 섰다.


드디어 입장. 고소한 빵 냄새가 진동한다. 빵 종류가 다양하다. 욕심부리지 않고 가장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을 하나씩 샀다.


아직 군산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데. 글이 너무 길어지면 지루하니,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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