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FJ 여행기

군산 여행, 가장 조용한 겨울을 걷는 일 2

멈춘 시간의 흔적, 적산가옥과 동국사의 겨울

by 이서


군산 하제마을의 600년 팽나무와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빵집 이성당을 다녀온 지난 이야기(1편)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dontgiveup/558


이성당에서 오랜 시간 기다려서 산 빵. 갓 구운 빵의 온기가 식기 전에 어디서 먹을까 고민하다가, 바다가 보이는 곳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빵 봉투를 달랑거리며 내항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든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갯벌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갯벌 위 어선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애처로워 보인다. 한때는 쌀을 실어 나르는 배들로 가득 찼었겠지.


근처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 샀다. 요새 나는 편의점 커피를 즐겨 마신다. 퀄리티가 웬만한 카페 못지않다. 추운 겨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바다를 보면서 아까 산 이성당 빵을 먹고 싶었다. 봉지를 뜯어서 커피와 함께 빵을 먹는데 참 운치가 있다. 는 거짓말이고, 너무 춥다. 바닷가 칼바람이 뺨을 때린다. 낭만이고 뭐고 너무 추워서 입이 돌아갈 것 같다. 빵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얼른 일어났다. 도망가자.


신흥동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을 구경하러 왔다. 붉은 벽돌 담장 너머로 보이는 독특한 지붕 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흔치 않은 일본식 목조 건물이다. 건축 공부할 때도 오고 싶지만 못 왔던 곳을 이제야 오는 군. 감회가 새롭다.


영화 좀 보신 분들이라면 이 대문이 낯익을 것이다. 맞다. 여기 영화 '타짜'의 '평경장' 집이다. 아래 영화 속 장면에서 고니가 평경장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떼쓰던 그 문이다. 저 문을 통해 평경장이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가고, 고니가 따라 들어가는 장면. 기억나시는지.

영화 ‘타짜’ 중에서


고니는 이곳에서 먹고 자며 손기술을 익혔다. 영화 속에서는 평경장의 아지트였지만, 실제로는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의 유지였던 포목상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현실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돈을 긁어모으던 집은 맞구만.


일제강점기 당시 군산은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던 통로였다. 그래서 군산항 근처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수탈의 역사와 함께 정착한 일본인들의 흔적인 이런 '적산가옥(敵産家屋)'이 군산에 많이 남아있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적산가옥'의 '적산'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정원은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 인위적이지만 정갈하게 다듬어진 나무와 돌들 그리고 작은 연못.


고즈넉하니 좋다.


다행히 건물은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되어 있다. 아픈 역사의 증거라고 없애버리지 않고, 후대를 위해 남겨준 누군가의 노력이 고맙다. 덕분에 나 같은 여행자는 교과서보다 더 생생한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눈에 담아 간다.


고니는 여기 마루에 앉아 화투 기술을 배웠지. 아수라 발발타. 아수라 발발타. 부자가 되고 싶니?

아수라 발발타


군산은 짬뽕이 유명하다며.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 '빈해원'을 찾았다. 역시나 명성답게 대기 줄이 길다. 1950년대부터 화교가 운영해 온 중국집이다. 근대기 군산의 화교 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림쯤이야, 맛있는 역사를 맛보기 위한 수업료라 치자.


입장했다. 내부가 독특하다. 천장이 뻥 뚫린 중정형 구조로 되어 있어 웅장하면서도 개방감이 느껴진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붉은 장식과 인테리어, 높은 층고 덕에 중국 어딘가에 와있는 느낌이다.


나왔다. 짬뽕. 국물 위로 수북하게 쌓인 건더기가 실하다.


알싸한 얼큰함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맛, 기다린 보람이 있다. 여기 진짜 맛있는데?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배도 꺼뜨릴 겸. 국내 유일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를 보러 가보자.


걷다 보니 거리 곳곳에 일본식 가옥을 개조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눈에 띈다. 낡은 외관을 그대로 살린 채 현대적 감성을 입힌 공간들이 군산만의 독특한 거리 풍경을 만들어낸다.


길가에 고양이가 가만히 앉아 날 지켜보며 식빵을 굽고 있다. 안녕.


도착했다. 동국사.

가파르게 떨어지는 팔작지붕의 경사가 한눈에도 이국적이다. 이런 모양은 조선 건축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처마의 곡선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우리네 절과 달리, 직선적이고 위압적이다. 에도 시대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보인다. 한국의 사찰인데도 어딘가 낯설다. 일본 건축에는 어쩐지 차가운 부분이 있다.


건물도 인상적이지만, 나의 발길을 잡은 건 대웅전 뒤편의 울창한 대나무 숲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대나무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노래를 부른다.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가 괜히 한가롭다.(영화 '봄날은 간다'의 대나무 숲 장면을 좋아합니다.) 귀를 기울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나른한 한적함이 좋구나.


서울의 명동처럼 군산에는 '수송동'이 번화가라고 한다. 어쩐지 사람 많은 곳을 구경하고 싶어 제미나이에게 길을 물었다. AI는 자신 있게 '롯데시네마 군산점'을 찍고 가라고 했다. 나는 의심도 없이 출발했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 걸을 수밖에 없었다.(나는 택시는 타지 않는다.)


한 시간을 꼬박 걸어 도착했다.


뭔가 이상하다. 번화가라며? 사람도 별로 없고 휑하다.


다시 네이버로 검색해 보니, 여기가 메인이 아니었다. 진짜 번화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아오, 인공지능의 말을 무조건 맹신하지 맙시다. 오늘도 길 위에서 하나 배웠다. (이렇게 힘들게 배울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지.)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이제 집에 가자.


터미널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이 옆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탄다.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바로 붙어있다. 근데 둘이 무슨 차이지.


피곤했나 보다. 하루가 참 길었다. 버스에 앉자마자 나는 곧바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팽나무 '할매'를 보러 무작정 떠나온 군산이었다. 나무를 바라보며 느꼈던 따뜻함뿐만 아니라, 영화 속 장면을 거니는 즐거움과 근대 역사의 흔적까지 덤으로 얻어 간다. 은근한 매력이 있는 도시다. 겉보기엔 무채색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다양한 색을 가진 묘한 도시다. 아마 일본식 가옥의 묘한 매력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이렇게 당일치기로 훌쩍 떠나 낯선 거리를 헤매보는 것, 꽤 괜찮은 경험이다. 낯선 풍경은 무뎌진 감각을 깨우고, 새로운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역시 여행은 뇌를 가장 즐겁게 자극하는 방법이다. 여행지에서 읽는 책은 두 배 더 깊이 들어오고, 여행지에서 걷는 길은 두 배 더 오래 기억된다.


오늘도 잘 먹고, 잘 걷고, 잘 봤습니다.

또 봐요,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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