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FJ 여행기

전주 여행, 느리게 걷고 맛있게 채우는 시간 1

국밥의 온기로 시작해 성당의 고요함을 만나다

by 이서


연말 연차를 소진하느라 휴가를 좀 썼다. 덕분에 요새 지방 여기저기 다니는 중이다. 좀 알아보니 내가 안 가본 지방 도시들이 의외로 많았다. 아니, 서울 밖은 거의 가 본 곳이 없다시피 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몇 번 무작정 떠나보니, 여행은 생각보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가면 된다. 특별히 뭘 알아보고 거창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그게 여행이 되더라. 그래서 또 집을 나섰다. 오늘 가 볼 곳은 '전주'.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탑승했다. 4번과 6번 좌석은 버스 바퀴 휠 하우스가 튀어 올라와 있어 다리를 뻗기가 영 불편하다. 같은 돈 내고 굳이 불편함을 살 필요는 없으니, 다음번 버스 예매 땐 피해야겠다. 참고하자.


전주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 주변이 꽤나 한산하다. 지방 도시 터미널 특유의 고즈넉함이라기엔 조금 썰렁한 느낌. 여기도 번화가는 어딘가 따로 있겠지 싶다. 예전에는 터미널 근처가 그 도시의 얼굴이자 최고 번화가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개인 차량의 증가와 기차 등 다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도시의 중심축이 이동했나 보다.


날씨가 유난히 좋다. 걷기 좋은 날이다.


밥부터 먹자. 전주에 왔으니 '현대옥' 본점에서 콩나물국밥을 먹어봐야지. 내가 서울에서 즐겨 찾던 그 현대옥의 시초다. (예전에 리뷰했던 글) https://brunch.co.kr/@dontgiveup/399


본점답게 건물 전체가 가게다. 웅장한 위용이 국밥집이라기보단 중소기업 사옥 같다. (매출은 중소기업 맞을 듯)


늘 먹던 '남부시장식'으로 주문했다. 펄펄 끓이지 않고 적당히 따뜻하게 토렴해 나오는 방식이다. 매번 수란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궁금했는데, 본점답게 '수란 먹는 방법'이 매뉴얼로 준비되어 있었다. 시키는 대로 김을 몇 장 넣고 국물을 몇 숟가락 끼얹어 비벼 먹으니 고소함이 일품이다. 국밥 맛은 서울 분점과 큰 차이 없이 훌륭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화장실이었다. 손을 닦고 말릴 수 있는 페이퍼 타월 대신, 뽀송뽀송한 수건을 비치해 뒀더라. 마치 고급 호텔에 온 것처럼. 국밥 한 그릇 먹으러 왔다가 뜻밖의 대접을 받는 기분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브랜드의 격을 높인다.


한옥마을에 들어섰다. 입구부터 잘 정비된 관광지 느낌이 물씬 풍긴다. 내가 예상한 한옥마을과 다르네.


거리를 따라 각종 먹거리 가게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고즈넉한 정취를 기대했는데, 조금 묘한 기분이다. 여기는 전통을 보존한 한옥마을인가, 아니면 한옥이라는 테마파크 스킨을 씌운 거대한 쇼핑단지인가. 각종 음식점들에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뒤섞여 묘한 활기를 띠고 있다.


전주 초코파이의 원조 논쟁이 있는 건가. PNB 풍년제과와 전주 초코파이 두 곳의 빵을 모두 사봤다. 본격 비교 분석이다. 결론은 '둘 다 맛있다.' 분석 끝.


전동성당 앞에 섰다. 호남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붉은 벽돌과 둥근 아치가 자아내는 곡선미가 웅장하다. 영화 '전우치'에 나온 그 성당이다.

영화 ‘전우치’


모든 건축물은 각자의 서사를 품고 있다.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처형당한 순교터 위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당의 주춧돌은 당시 천주교인들을 박해했던 전주읍성의 성벽 돌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박해의 현장 그 자체를 믿음의 증거로 변화시킨 셈이다. 일종의 '용서'가 아닐까 한다. 종교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다.


뭔가 '명동성당'과 흡사해서 좀 찾아봤더니,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이 전동성당도 같이 설계했다고 한다.


운이 좋아 성당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내부는 촬영 금지라 눈으로만 담았다.) 실내는 예상보다 훨씬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아치형 기둥 사이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이 형형색색의 조각을 뿌린다. 어느 하나 과하지 않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다. 관리가 정말 잘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외부의 소란스러움과 단절된 채, 고요하고 미니멀한 실내가 주는 압도감이 있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민폐 끼치는 사람이 적어(없다는 말은 아님) 잠시 평온을 즐겼다.


한참을 앉아 있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시 한번 성당을 둘러보다가 미간이 찌푸려졌다. 성당 외벽 벽돌을 깊게 긁어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이름이 새겨지거나, 쓰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내부에선 정숙하고 사진 촬영 금지라고 여기저기 안내가 되어 있건만, 기필코 찰칵찰칵 셔터 소리를 내며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들. 외부에는 저렇게 이름을 벽에 새겨놓고 훼손하는 사람들.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세상에는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걸 느낀다. 이 아름다운 유산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풍남문. 조선 시대 전주부성의 남쪽 문이다. 옛 전주성을 감싸던 4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문이라고 한다. 서울로 치면 숭례문(남대문) 같은 존재다. 묵직한 돌 성벽 위에 날렵하게 얹힌 누각이 옛 도읍의 위엄을 보여준다. 아래쪽이 공사 중이라 가까이 들어가 보진 못했다.


풍남문 바로 옆에는 남부시장이 있다. 아주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시장 내부에 '청년몰'이라는 곳이 유명하다길래 와보고 싶었다. 젊은 감각으로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곳이다.


아, 근데 마침 오늘이 휴무인가 보다. 셔터 내려진 가게들만 덩그러니 있어 아쉬웠다.

저도 동의합니다


고양이 혼자 문 닫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오늘은 영업 안 해요.'라는 표정이다. 알겠어. 안녕.


글 한편이 너무 길다.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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