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FJ 여행기

전주 여행, 느리게 걷고 맛있게 채우는 시간 2

아름다운 것과 불편한 것, 그 모든 풍경의 합(合)

by 이서


전주의 한옥마을, 전동성당, 콩나물국밥집 '현대옥'을 다녀온 지난 이야기(1편)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dontgiveup/560


전주향교

전주향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 시대의 국립 교육 기관이었던 만큼, 오래된 목조 건물이 기품 있다. 그런데 웅장한 입구 정면에 떡하니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저 현수막의 내용이 수백 년 된 건축물의 미관을 해치면서까지 알려야 할 만큼 중요한 걸까.


대성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당연히 공자는 그들에게 '성인'의 위치였다. 향교 내에 위치한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례공간이다.


명륜당

대성전 뒤편. 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처마 각도가 독특하다.


옛 건물들에 감탄하며 찬찬히 둘러보는데, 참. 이게 참담하다.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어놓은 흔적들. 대체 무슨 심리로 문화유산에 구멍을 내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문 상태를 보니 하루 이틀 된 게 아닌 것 같은데, 이걸 그대로 방치하는 관리 주체는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창호문과 마찬가지로 향교 전체적으로 관리가 안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외국인 관광객 몇몇도 흥미롭게 둘러보고 있던데, 어쩐지 부끄러웠다. 얼른 자리를 떴다.


오목대

향교에서 조금만 언덕을 오르면 나온다. 이성계가 고려 말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승전을 자축하며 연회를 벌였던 곳이다. 연회에서 이성계는 '대풍가'를 부르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역성혁명의 야심을 드러냈다.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정몽주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실제로 연회를 박차고 뛰어나갔다고 한다.)


야심에 찬 이성계의 호기로운 노랫소리와 분노를 삼키며 돌아섰을 정몽주의 뒷모습이 이 언덕 위에서 상상된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 누각이, 실은 조선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태동하고 고려라는 낡은 세계가 저물어가던 가장 극적인 충돌의 현장이었구나 싶다. 새삼 대단한 곳에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목대 높은 곳에 서니 한옥마을의 기와지붕 물결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와 곡선들이 겹겹이 이어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이성계도 여기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하를 꿈꿨을까. 그는 저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었겠지. 나는 세상이고 뭐고, 너무 춥구나. 얼른 내려가자.


저녁은 전주의 명물, '베테랑 칼국수'다.


나왔다. 칼국수. 위에 고춧가루, 김 가루, 그리고 들깨가루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산더미처럼 뿌려준다. 걸쭉하게 풀린 계란 국물 덕분에 칼국수라기보단 면이 들어간 죽을 먹는 느낌이다. 낯선 매력이 있다.


이름은 칼국수인데 면발이 독특하다. 칼로 썰어낸 납작한 면이 아니라, 단면이 둥근 중면을 사용한다.


객사길

객사길로 나왔다. '객사'는 조선 시대에 외국 사신이나 관리들이 묵던 숙소인데, 그 주변으로 번화가가 형성되어 '객사길'이라 불린다고 한다.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다. 어쩌다 보니 지방 도시에 올 때마다 이런 번화가를 찾게 된다. 어떤 상점들이 영업하는지, 이 도시의 젊은 활기는 어떤 색깔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객사길을 한참 구경하다 길 건너 '한스델리'가 보이는 스타벅스로 들어왔다. 쉬엄쉬엄 다녀야 하는데 오늘도 강행군이었다. 이러면 오래 여행할 수 없다. 지속가능하려면 '쉼'도 루틴에 넣어야 한다. 그나저나 한스델리를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푹 쉬었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해가 져 있다. 이제 집에 가자.


터미널로 돌아왔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터미널 안 광고가 재미있다. 한민관 씨는 전주에서 로봇에게 모발이식을 받으셨나 보다.


버스에 탔다. 바로 잠들었다. 한참 자면서 가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쎄한 느낌. 그게 후각이었는지, 아니면 본능적인 직감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신발을 벗은 발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저렇게 발을 올리고 코를 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꽤 쇼킹한 광경이었다. 원래 저렇게 신발을 벗고 앞자리 팔걸이에 발을 올려도 되는 건지, 고속버스에 그런 예절 매뉴얼이 별도로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뭔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저게 당연시되는 거라면 나는 더 이상 고속버스는 못 타겠다.) 어쩔 수가 없다. 그냥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다양한 모습을 본다. 그게 좋은 모습도 있고, 나쁜 모습도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친절함도 있지만, 훼손된 문화재와 무례한 발바닥도 만난다. 괜찮다. 저런 것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피하면 된다. 나는 그러지 않으면 되니까. 가장 좋은 교사는 '반면교사'아니겠는가 ㅋ 예전 해외 패키지여행을 자주 할 때는, 무례한 사람들과 일주일 이상을 같이 다니기도 했는데 뭐, 이 정도야 귀엽지.


여행의 목적은 예쁘고 멋진 것들만 골라 보는 게 아니다. 피하고 싶은 것들도 마주쳐야 좌절하고, 그걸 극복해야 성장한다. 그래야 멘탈도 단단해진다. 그것도 여행의 일부다. 뭔가 여행 예찬론자가 된 것 같은데ㅎㅎ 예전 고대 사람들이 고행에 가까운 순례길을 떠난 것도 이런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자 했던 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앞으로도 계속 여기저기 보면서 다닐 생각이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


오늘도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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