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갈 일이 생겼다. 꽤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계획이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기차표 구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사이트에 접속하면 야속하게도 늘 전석 매진. 매번 이런 식이다. 지방 곳곳을 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운전은 영 내 취향이 아니고 버스는 너무 길고 지루하다. 덜컹거리는 낭만이 있는 기차가 딱인데 말이지. 결국 이번에도 '매진'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기차역으로 가보자. 현장에 가면 취소표라도 나오지 않을까? '입석'이나 '현장 구매'라는 희망도 있지 않은가. 안 되면 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고민이 길어지면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법, 생각 났을 때 이것저것 재지 않고 저지르는 게 답이다. 대충 옷을 입고 가방 하나 둘러맨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양재역에 도착했다. 늘 지나다니는 익숙한 지하철 풍경이지만, 오늘은 목적지가 다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뭔가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3호선에 몸을 싣고 수서역으로 향한다.
수서역에 도착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고 있다. 그 틈에 섞여 나도 '떠나는 사람'의 대열에 합류하면 좋을 텐데.
설레는 마음으로 자동 발권기 앞에 섰다. 혹시?!!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구행은 전부 '매진' 표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창구로 향했다.
"혹시 동대구 가는 표 있을까요?"
"전석 매진입니다. 가장 빠른 건 저녁 8시 반 기차입니다."
아오, 역시 인생은 시트콤이다.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순 없다. 대합실 의자에 일단 앉았다. 앱을 열었다. 당연히 화면엔 '매진' 글자만 가득하다. 오기가 생긴다. 될 때까지 해보자.
새로고침 버튼을 반복해서 눌렀다. 누군가 급한 사정으로 취소한 표 한 장이 나오길 바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반짝하고 표가 떴는데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 낚아채 갔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의 심정이구나. 다시 열심히 새로고침을 눌렀다. 드디어 하나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손놀림으로 예매 버튼을 눌렀다. 결제성공. 가자, 대구로.
오늘 나를 태워다 줄 기차.
굳이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한국의 기차들은 왜 세차를 안 하는 걸까. 매번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외관이 아쉽다. 해외 여행지에서 만난 기차들은 반짝반짝 빛이 나거나 멋진 래핑으로 치장하고 있던데. 쉴 새 없이 달리느라 씻을 시간도 없는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 뭐. 내 차 세차도 미루는 주제에 기차 걱정은 그만두자.
커피 한 잔 사서 탔다. 가방에 책 한 권만 넣어서 나왔다. 덜컹거리는 진동을 느끼며 읽는 글자야말로 기차 여행의 백미다. 차창 밖 풍경 한번, 책 한 줄, 그리고 커피 한 모금. 완벽한 삼박자.
이어폰을 꽂고 구글뮤직을 열었다. 첫 노래로 빌리 진을 선택했다.
여기엔 꽤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모든 여행은 첫 노래가 중요하다. 정말이다. 첫 노래가 여행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빌리진은 나쁘지 않다. 베이스 라인의 리듬이 기차 바퀴소리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기차 좌석엔 안전벨트가 없는 걸까. 사고가 나면 안전벨트 따위는 무의미하게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인 걸까. 어차피 크게 다치거나 죽는데, 원가 절감이라도 해야 하니, 안전벨트 따위는 사치라는 걸까. 나는 늘 너무 페시미스틱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쳐야 하는데 잘 안된다.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도시의 공기가 낯설다. 서울과는 또 다른 공기의 밀도가 느껴진다. 각 도시는 각자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데, 낯선 곳에 올 때마다 그 분위기를 느끼는 재미가 있다.
목적지로 걸어가는데, 이 동네 좀 신기하다.
편의점이 없다. 30분 넘게 걸으면서 한 개 봤던가.
동네 빵집이 많다. 파리바게뜨보다,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빵집이 많다. 참 좋다.
병원이 많다. 나는 지역의 노쇠화 지표로 동네 병원의 밀도를 보는데, 이 동네 상가마다 개인병원들이 가득하다. 도시의 나이테가 느껴진다.
도착했다.
여기 방문하기 위해 대구에 왔다. 중화비빔밥에 대한 궁금증을 종결하려고. 자세한 후기는 '맛따라 멋따라'에서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자.
밥을 먹고, 근처 '칠성중앙시장'을 구경하러 왔다.
대통령들이 대구에만 오면 찾는 그 칠성시장 맞다.
https://www.yna.co.kr/view/PYH20190322150900013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31107010000848
시장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전통과 역사라는 가치는 머리로 이해하겠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다. 위생적인 부분도 아쉽고, 젊은 세대가 굳이 이곳을 찾아와 쇼핑을 즐길 것 같지는 않다. 안타깝다.
얼른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자리를 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전통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할지, 나는 그 답을 잘 찾지 못하겠다.
길거리 호떡하나 사 먹었다. 1000원. 기름에 구워진 밀가루 안의 달콤한 설탕이라니. 맛이 없을 수가 있나. 역시 단순한 게 최고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대구의 명동, 동성로에 왔다. 조금 전의 시장과는 180도 다른 분위기다.
여기 재밌네. 한약방거리부터 주얼리거리까지. 대구 사람들이 다 어디 있나 했더니, 모두 여기 모여 있었군. 대구는 동성로에 몰빵인 건가.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이 모두 이 근처다. 대구역도 바로 앞이고. 사람들이 왜 '대구 하면 동성로'라고 말하는지 잘 알겠다. 핸드폰케이스 가게랑 가차샵이 많더라.
차가운 바람이 매서워서 반월당 지하상가로 피신했다. 내려와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보니 인천 부평 지하상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거 원 추위 피해 들어왔다가 길 잃겠구만.
사찰 '보현사'를 찾았다. 1919년 3월 30일, 대구의 만세운동이 바로 이곳 젊은 학승들의 주도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를 제작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절이 왠지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대구에 왔으니 '콩국'을 안 먹어보고 갈 순 없다.
여기가 후기가 많아서 이리로 왔다. '제일콩국'
입장했다. 벌써 고소한 냄새가 난다.
나왔다. 찹쌀콩국.
달지 않은 율무차 맛이다. 달게 먹고 싶으면 옆에 준비된 설탕을 취향껏 넣어 먹으면 된다.
들어간 고명은 구운 인절미 맛. 인절미 튀김 같다. 아, 추웠는데 뜨근해서 좋다. 겨울 여행의 묘미다.
이제 슬슬 어두워진다.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콩국집까지 너무 멀리 걸어왔다. 동대구역 기차 시간에 맞춰 걸어가려면 빠듯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단 걸어보자. 1시간 30분 정도 가면 될 듯. 도시를 구경하며 걸어보자.
슬슬 해가 진다. 낯선 도시에서 맞이하는 밤은 늘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앗,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꺼냈다.
비 내리는 대구의 밤거리. 젖은 아스팔트 위로 비치는 네온사인.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 빗물에 젖은 거리가 한 층 더 운치 있다.
다시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다. 다리는 힘들지만 머릿속은 맑다. 하루를 꽉 채웠다.
아내와 아들에게 줄 간식도 몇 가지 샀다.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간다.
매번 기차표 매진이라는 핑계로 미뤄왔던 대구행이었다. 하지만 일단 저질러보니 어떻게든 길은 이어졌다.
어쩌면 '매진'은 못 간다는 통보가 아니라, 정말 갈 것인지 묻는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괜히 망설였다. 그냥 해보면 될 걸 말이지. 이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언제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결국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는가. 이 기분 좋은 자신감이 식기 전에 또다시 지도를 펼쳐봐야겠다.
오늘도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