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많은 것이 해결됩니다.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떡볶이가 생각나는 오후. 나는 떡볶이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 어쩐지 그럴 때가 있다. 문득 광장시장의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거기에 윤기 흐르는 꼬마 김밥을 곁들이고, 뜨끈한 오뎅 국물 한 모금 마시면 더할 나위 없겠지.
마음이 동했으니 가보자. 대중교통 대신 두 발로 도시를 느껴보자. 지도를 찍어보니 9.4km, 대략 세 시간 정도 걸리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좀 걷다 보니, 이제 네이버 지도로 조회해 보면 오차를 포함해 거리와 소요시간이 대충 짐작 가능하다. 이것도 일종의 성장이라면 성장이겠지.)
누차 말하지만, 우리는 걸어야 한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었다. 게다가 걸으면 더 많이 알게 된다. 그게 무엇이든지 말이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그의 작품 '돈키호테'에 이렇게 썼다.
El que lee mucho y anda mucho, ve mucho y sabe mucho.
(많이 읽고 많이 걷는 자는, 많이 보고 많이 알게 된다.)
가보자.
그 길에서 무언가 깨닫게 될지도.
추운 겨울 오후의 강남역은 언제나처럼 수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다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 틈바구니에 섞여 조용히 걷는다.
사진이 어둡게 나왔네. 조금 아쉽지만, 이것 또한 완벽하지 않은 여행의 기록이니 그대로 올린다.(사실은 귀찮아서 ㅋㅋ) 어느새 신사역을 지난다.
무채색 빌딩 숲 사이, 강렬한 빨간 철제 계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칙칙한 도시의 풍경에 생동감 넘치는 포인트.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하늘은 맑고 쾌청하다. 걷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는 없지.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상쾌하다.
다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올림픽대로. 오늘도 역시 차들로 빼곡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를 움직이는 혈관 같다.
저 멀리 경광등을 켠 경찰차와 구급차, 견인차가 엉겨 있다. 한남대교 위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가까이 와보니, 사고 규모가 컸던 것 같다. 조수석엔 에어백까지 터져있다. 아무도 안 다쳤기를.
사고가 나든 말든, 자연은 복잡한 도로 위 상황에 무심하다. 인간의 속도와는 상관없는 듯, 붉은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강물 위로 부서지는 윤슬과 노을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마치 한강 속에 빛이 기둥이 서 있는 듯하다. 아름답게 빛난다.
한남동으로 들어서니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인다. 낮은 건물들 덕분에 하늘을 더 넓게 볼 수 있어 걷는 맛이 난다. 이런 여유 있는 풍경이 좋다.
한남초등학교 건물 외벽이 알록달록 귀엽다. 동심을 닮은 파스텔톤 색감이 걷는 길에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이제 본격적으로 남산을 오른다. 경사가 조금 느껴져 숨이 가빠온다. 땀이 난다.
김수근 씨의 이 작품은 볼 때마다 인상 깊다.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설계를 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나올 뿐이다.
테니스 코트에서 사람들이 열심히 공을 주고받는다. 테니스 붐은 여전한 건가. 잘 모르겠네. 요샌 러닝이 인기라던데. 나는 어쩐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면 피하고 싶어진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관순 열사 동상을 바라본다.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수표교를 만났다.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교각을 마름모꼴로 세웠다는 해석이 있던데, 좀 이상하다. 정말 저항을 줄이려 했다면 둥근 형태가 더 낫지 않았을까? 당시 기술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동대입구를 지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앰버서더 호텔은 앞쪽 건물 전체를 선물모양으로 만들어놨다.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그런 의미에서 길거리 캐롤 소리가 사라진 건 참 아쉽다. 저작권이 강화되어 그랬다던가, 아무튼. 캐롤 저작권이 있는 소유자들은 자영업자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길거리에 캐롤을 틀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럴 리가 있나. 안타깝다. 이젠 아무도 캐롤을 듣지 않는다.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다.
해가 지는 도시의 퇴근길 도로, 그 특유의 감성이 좋다. 질서 정연하면서도 바쁜 풍경. 이런 거 보면 서울 속에도 도쿄 못지않은 부분이 있다. 걸을수록 보인다.
방산시장을 지난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히 무엇을 파는 곳인지 궁금하다. 탱크나 무기를 판매하는 시장일까.
궁금하면 들어와 봐야지. 각종 종이나 포장 박스, 인쇄물을 전문으로 다루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도매상 특유의 활기와 투박한 매력이 느껴진다.
긴 걸음 끝에 드디어 도착했다. 광장시장.
사람들이 많다. 노점들은 성업 중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관광명소라서 패키지 코스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 가이드를 동반한 외국인들이 많더라.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는 빈대떡 파는 가게부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칼국수집까지. 다양한 가게들이 있다. 맛있는 유혹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그야말로 복작복작한 시장통이다. 출출하다. 먹으러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나도 얼른 가게를 골라서 앉아봐야겠다. 어디로 가볼까나.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곳을 찾았다. 왠지 과묵할 것만 같은 젊은 청년 사장님이 운영하는 노점을 선택했다.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온열기능이 있는지 따뜻해서 좋다. 떡볶이, 오뎅, 김밥을 주문했다. 기다렸다는 듯 음식이 바로 내어진다. 시장만의 스피드가 놀랍다.
쌀떡. 쫄깃쫄깃한 가래떡을 쓴 것 같다. 매콤 달콤하다. 오호, 세 시간 넘게 걸어온 보람이 있다.
땀이 식으며 살짝 한기가 돌던 차에 뜨끈한 오뎅 국물이 반갑다. 뜨끈한 오뎅국물 맛은, 말해 뭐 하랴. 훌륭하다. 큼직한 유부가 고명으로 올라가 있는 게 특이하다.
김밥 옆에 놓인 노란 소스를 찍어 먹어보니 맛이 독특하다. 예전에 '마약김밥'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게 했던 바로 그 겨자 소스인가 보다. (지금은, 식품에 '마약'관련 명칭 사용이 금지되어서 아마 '마약김밥'이라는 메뉴명은 못쓰는 걸로 알고 있다.) 톡 쏘는 새콤달콤함이 평범한 꼬마 김밥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11km 정도를 걸었고, 3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광장시장 가보자고 무턱대고 나온 길이 의외로 길었다. 최근 광장시장이 메뉴 구성이나 가격 문제 등 여러 이슈로 부침을 겪고 있다. 모쪼록 잘 해결되어 상인과 소비자 모두 웃는 시장이 되길 바란다. 전통시장의 활성화야말로 지역 경제를 살리는 핵심 아니겠는가. (갑자기 경제 뉴스 멘트로 마무리 ㅋ)
오늘 이렇게 걸어보니, 서울의 이름난 전통시장을 하나씩 도장 깨기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전통시장을 돌아보며 맛있는 것 사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시장별로 각자 매력이 있을 테니 말이다. 갑자기 기대되는군. 어디든 어떠랴. 발길 닿는 대로 걸어봅시다.
오늘도 잘 먹고 잘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