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FJ 여행기

걷기, 강남역에서 남산타워까지

걸으면 많은 것이 해결됩니다

by 이서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겨울이다. 걸어야 되는데. 영하의 추위 탓에 선뜻 길을 나서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웅크리고만 있기엔 아까운 나날. '일단 나가보자'는 마음으로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목표는 대략 10km 남짓. 지도를 켜고 적당한 코스를 물색해 보니, 강남역에서 남산타워까지가 얼추 그 정도 거리였다. 도심을 가로질러 산 정상까지 닿는 여정. 이 정도면 꽤 근사한 겨울 산책이 될 것 같다. 가보자.



아침 이른 시간 출발한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아서인지 새벽 공기가 무지무지 춥다. 뭔가 잘못됐는데 이거.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한기가 옷깃을 파고든다. 괜찮다. 조금 걸으면 몸에 열이 나고 곧 괜찮아질 거다. 얼어붙은 몸을 깨우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새벽 강남역은 어젯밤의 뜨거웠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하다. 술 취한 인파로 북적이던 거리는 텅 비어있고, 화려하던 네온사인도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침 일찍부터 환경미화원 분들이 도로를 청소하고 계신다.


신논현역이다.


역시나 엉망으로 주차된 공용 자전거. 누가 발로 차서 저렇게 된 건지,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가지런히 정돈된 새벽 거리와 대비되는 무질서한 풍경이다.


논현역을 지난다. 하늘이 짙은 푸른색에서 옅은 회색으로 밝아진다. 여명이 트기 시작한다. 근데 해가 뜬다고 당장 따뜻해지는 건 아닌가 보다. 계속 춥다. 옷을 좀 더 두껍게 껴입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확실히 겨울 걷기는 다른 계절들과 다르다. 추위에 대한 좀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겠다. (파워 J의 다짐)


공사 현장도 하루를 준비 중이다. 모두 모여 체조 중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걷기 전에 발목 스트레칭조차 안 했는데, 앞으론 좀 해야 되나 싶다.


길을 걷다가 난데없이 한 대 맞은 기분이다. 무슨 의미로 저런 입간판을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기발한 아이디어라며 자화자찬했겠지. 나는 지금도 저게 욕이 아니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ㅆㅂ'과 '뱅쇼'가 합쳐지니 묘하게 폭력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신사역을 지난다. 가로수길 입구를 스쳐 지나간다. 이제 빌딩 숲을 벗어나 곧 넓은 강을 마주하겠지.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다. 이건 여름철 횡단보도 그늘막이었던 것 같은데, 겨울에는 이렇게 트리로 이용하는 아이디어가 참 좋다. 삭막한 겨울 도시 풍경 속에서 만난 따뜻한 불빛에 기분이 좋아진다.


한남대교를 만났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


여전히 강은 유유하다. 얼어붙지 않은 강물은 묵묵히, 그리고 천천히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속도와는 다르다. 자연은 언제나 급할 것 없이 느긋하다.


한 겨울 다리 위는 꽤 춥다. 강바람이 꼭 송곳 같다. 그래도 걷는다. 저~~~ 멀리 아득하게 나의 목적지 남산타워가 조그맣게 보인다.


잘 정리되고 세련된 강남역 근처와는 다른 도심 풍경이 색다르다.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건물의 높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특유의 정겨우면서도 아기자기함이 느껴지는 거리 풍경이 걷는 재미를 더해준다.


여기가 한남동쯤인가. 독특한 건물들이 많아 보는 맛이 있다.


블루스퀘어를 지난다. 물랑루즈 공연 중인가 보다. 아직 물랑루즈는 관람하지 못했다.


이제 산을 오르면 된다.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과, 숲 속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두 종류가 있었다. 나는 기왕이면 아스팔트보다는 흙을 밟으며 자연을 즐기고 싶어서 후자를 선택했다. (이후에 이 선택으로 인해 어떤 고생문이 열릴지 꿈에도 모른 채)


산길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눈이 얼어붙어 길은 미끄럽고 위험했다. 나는 러닝화를 신고 나왔는데, 과연 이 신발로 무사히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다. 자칫하면 넘어져 다칠 수도 있겠다.


1.99km만 산을 올라가면 된단다. 알다시피 평지에서 2km는 금방이지만, 눈 덮인 미끄러운 산길에서의 2km는 전혀 다르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산속에는 인적 하나 없다. 서울 한복판에 나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다. 들리는

건 내 거친 숨소리와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뿐. 이 적막함이 낯설다. 외국에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좋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벤치 위 고양이 발자국이 귀엽다. 작고 동그랗다. 이 추운 날씨에 어디를 간 거니.


이건 가벼운 산책이 아니라 본격적인 등산인데. 이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길이 생각보다 훨씬 험하다. 아, 숨차다. 이건 '가벼운 걷기'의 범주를 넘어선 강도다.


그래도 720m만 가면 된다.


산행 내내 길안내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불편했다. 남산이면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인데, 이렇게 안내가 허술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만들어진 '등산로 아님!' 표식이 유난히 많았다. 이런 표지판을 만들 시간에 정식 탐방로를 더 잘 정비하고 안내하면 될 텐데.


한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가는데, 아래 사진처럼 다짜고짜 '출입 금지'라며 여기저기 많은 길을 공사판으로 막아놨다. 가뜩이나 표지판이 불친절한데, 유일해 보이는 길을 저렇게 막아놓고 아무런 우회 안내가 없었다.


이 길 하나뿐인데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당황스러웠다. 이 길이 출입금지라면 어디로 돌아가라고 종이 한 장이라도 출력해서 붙여놓았으면 어땠을까. 아쉽다. 덕분에 나는 추위 속에서 산속을 여기저기 헤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빙빙 돌아 결국 제대로 된 길을 찾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남산타워가 손에 잡힐 듯하다. 산길을 헤맨 끝에 마주한 타워의 모습이라 그런지 유난히 더 반갑다.


설경.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피어난 눈꽃이 아름답다. 겨울길의 매력이다.


가까이서 본 남산타워가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그랬는데,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니 압도적이다. 그동안 무시해서 미안.


이제 다 올라왔다. 마지막 가파른 경사를 오르며 숨을 깊게 몰아쉰다. 공기가 차고 맑다.


도착했다.


너무 일찍 왔나 보다. 아직 남산타워는 오픈 전이었다. 나는 애초에 입장할 건 아니었으니, 그냥 돌아가기로 한다. 대신 아무도 없는 전망대 벤치에 앉아 서울 시내를 잠시 독차지했다. 조금 숨을 고르고 돌아왔다.


3시간 넘게 걸었다.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는데, 남산에서 길을 너무 헤맸다. 그래서 총 거리도 11km 정도로 최종 기록되었다. 뭐 괜찮다. 덕분에 남산의 구석구석을 더 많이 걸으라는 하늘의 도움이었겠지. 좋게 좋게 받아들이자.


근데, 생각보다 겨울 걷기가 재미있다. 춥긴 하지만 그건 장비를 좀 더 챙기면 될 듯하고. 주변 경관이 봄여름의 도시와 사뭇 다르다. 눈꽃의 설경이 아름답고 신비하다. 걸어오길 잘했다.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다.

오늘도 잘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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