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텍스트를 믿는다
기록을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텍스트가 가진 불멸의 힘을 믿는다. 유튜브와 숏폼 콘텐츠가 시각을 자극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이지만, 지식의 정수는 여전히 활자 속에 흐르고 있다고 믿는다. 인류를 지배해 온 문자의 힘은 미래에도 변함없이 유효할 것이다.
매년 습관처럼 혼자 정리해 간직하던 독서 리스트를 올해는 더 정갈하게 다듬어 본다. 이 기록이 훗날 아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빠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들이, 그리고 탐독했던 책들이 너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독서량
내 2025년 한 해 동안의 독서량은 월평균 약 5.4권이었다. 1주일에 적어도 한 권 이상은 반드시 읽으려고 했다. 독서량은 연초에 비해 하반기로 갈수록 늘었다. 매년 그렇지만, 나는 연초나 여름에 약속이나 여행이 많다. 그래서 날이 추워지는 하반기에 독서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역시 추울 땐 독서가 최고의 레저다. 구체적으로 연간 독서량 흐름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반기(1월~6월) : 월 4~6권 정도를 꾸준히 읽으며 안정적인 독서량을 유지했다.
•중반기(7월~8월) : 7월(2권)과 8월(4권)은 상대적으로 독서량이 주춤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를 가졌다. 라고 좋게 쓰기엔, 너무 놀았구나.
•하반기(9월~12월) : 10월에 총 9권으로 연중 가장 많은 책을 읽었으며, 11월(7권), 12월(8권)까지 높은 독서량을 유지하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선호 작가
나는 소위 '전작(全作) 주의'를 지향한다. 한 작가를 정해두고 집중적으로 몰입한다. 그의 세계를 수직으로 깊게 파고드는 방식을 좋아한다. 일종의 도장 깨기. 편식에 가깝다. 텍스트 너머에 있는 한 인간을 온전히 탐구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마치 AI가 특정 데이터를 집중 학습하듯, 나 역시 한 작가의 모든 텍스트를 내 뇌에 입력하고 패턴을 익히고 싶다. 그래야만 비로소 작가의 사유 체계를 온전히 내 것으로 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25년, 내 알고리즘을 자극하고 점령했던 작가는 누구였을까.
•연초 : 1월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들로 시작하여, 2월과 3월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와 '웃음' 시리즈 등 상상력이 풍부한 장편 소설에 집중했다. 이와 동시에 니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전을 읽으며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연중 : 4월부터 7월 사이에는 송길영의 '시대예보' 시리즈,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와 '넥서스' 등 미래 사회의 흐름과 인류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손에 들었다. 또한 김영하, 정지아 등 한국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맥락을 짚어보는 시기를 가졌다. 나는 인간 심리 탐구에 관심이 많다.
•연말 : 8월부터 12월까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을 주로 읽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1Q84', '해변의 카프카', '기사단장 죽이기',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등이다. 하루키 세계 안으로 깊게 뛰어들었다.(거의 매일 하루키만 읽었다.) 11월과 12월에는 리 차일드의 스릴러물을 동시에 즐겼다. 'AI강의 2025'와 같은 최신 기술 트렌드와 '카네기 인간관계론', '호감의 디테일' 같은 실용적인 자기 계발 및 대화법에도 관심을 가졌다.
내 독서는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인문학과 철학의 언어를 빌려 그 본질을 파헤쳐보고 싶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내 삶을 지탱하고 설명해 주는 평생의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깊은 사색이 담긴 책들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런 책들을 읽지 않고서는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다. 독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소멸하겠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 시리즈(2~3월 독서)를 통해 인류의 진화적 대안을 탐색했다.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내 흥미를 자극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5월 독서)가 제시하는 인류의 역사 및 미래 진화 시나리오를 읽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베르베르와 하라리 두 작가는 소설과 인문학이라는 장르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고정된 인간의 형태를 넘어, 기술이나 환경 변화에 따라 변화할 인류의 운명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AI가 재편하는 새로운 사회 구조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과 국내 저자들의 통찰은 기술이 인간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7월에 읽은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는 정보 네트워크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며, 이는 4월과 5월에 걸쳐 읽은 송길영의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및 '시대예보: 호명사회'와 연결된다. 하라리와 송길영 두 저자 모두 과거의 집단적 구조가 무너지고 데이터와 지능형 네트워크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개인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경고하거나 예견했다. 이러한 맥락은 연말에 읽은 박태웅의 'AI강의 2025'로 이어졌다. 기술적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 탐구로 확장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AI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세계는 나에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궁금증
유발 하라리의 미래 예측을 넘어, 인간이 가진 고유한 특성(웃음, 지능, 소통)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 싶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3~4월 독서)이 인간만이 가진 유머라는 특성을 통해 역사를 관통했다면,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5월 독서)를 통해 과학적 사실로 인문학적 성찰을 보완해보고 싶었다. 결국 이러한 나의 지적 탐구 여행은 연말의 '카네기 인간관계론'이나 '호감의 디테일'과 같은 실천적인 인간 이해로 귀결되었다. 일종의 '실무 지침서'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올해는 '인간'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시작해 '내 곁의 사람'이라는 미시적 관계로 탐구의 폭을 뾰족하게 다듬어 나갔다.
이렇게, 한 해를 되돌아보며 알아본 올해 내 독서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진화적 상상력(베르나르 베르베르) → 역사와 기술의 구조적 분석(유발 하라리) → AI로 급변하는 사회의 실천적 통찰(송길영/박태웅) 하지만 가장 탐닉한 건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작가 중심으로 읽는 버릇은 고치지 못할 것 같다.
올해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