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영화)를 보다

by 이서


여행자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무엇을 '하러' 가는 사람과 아무것도 '안 하러' 가는 사람. 나는 온전히 후자다. 그래서 내 여행에는 거창한 목적도, 반드시 들러야 할 관광 명소의 목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낯선 곳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 나에게 영화 '여행과 나날'의 개봉 소식은 유독 반가웠다. 어떤 해외 매체는 이 영화를 두고 '내향적인 사람들을 위한 우아하고 섬세한 찬가(Celebration of introverts)'라고 평했다. 그 한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영화가 내 취향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상영관이 많지 않더라. 좀 찾아봤는데, 볼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맞는 곳은 신촌의 '필름포럼'이었다. 예매하고 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좀 일찍 갔다. 나는 정해진 예약시간을 대기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타입이라, 비행기 혹은 버스 출발시간보다도 늘 한두 시간 일찍 간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상영 시간까지 남은 여유, 극장 안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영화를 만나기 전의 이 고요한 준비 시간이 마치 여행의 출발지처럼 느껴졌다.


상영관은 아담하고 따뜻했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속 여행의 문법은 나의 철학과 기분 좋을 만큼 일치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주인공 '이'와 현지인의 대화였다. (정확한 대사는 아닙니다. 대화의 흐름이 이랬다는 겁니다.)


“여행하면서 이것저것 많이 보셨나요?”

“네.”

“그럼 근처 온천에는 가보셨어요?”

“아니요.”

“저 위 사찰에는요?”

“안 갔어요.”

“아니, 그럼 대체 뭘 하셨다는 거예요?”

“그냥... 흐르는 강물도 보고, 그랬어요.”


그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타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텅 빈 시간처럼 보이겠지만, 강물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은 그 어떤 관광보다 밀도 높은 행위다. 목적 없는 여행이 선사하는 그 묘한 해방감이야말로 내가 여행을 떠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니까. 영화는 그 미묘한 매력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주연인 심은경 배우는 내가 주목하는 연기자다. 갑자기 일본으로 유학, 일본 영화에 계속 도전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나는 자기만의 고집을 가지고 살아가는, 스토리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심은경 배우가 그런 류로 보인다. 비슷한 의미로 요새 최강록 셰프, 박정민 배우 등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앞으로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는 서사보다 이미지와 소리에 집중한다.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질감의 매력을 뿜어낸다. 자연의 풍경을 긴 호흡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특히 겨울 편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펼쳐진 흰 설원은 압권이었다. 아날로그적 감수성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풍경이 내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두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특별히 뭔가 하지 않는 게 주목적이 되어야 한다.


주인공 '이'는 스스로를 '말로부터 도망친 사람'이라 부른다. 가끔은 나도 그렇다. 세상의 수많은 말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연필로 종이에 글씨를 쓰는 사각사각 소리, 해변에 내리는 빗소리, 차갑게 흐르는 강물 소리, 그리고 발밑에서 뽀드득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눈의 감촉. 영화를 채운 이 세밀한 소리들은 말로부터 도망쳐 온 주인공을, 그리고 관객석의 나를 가만히 위로해 주었다.


물론 이 영화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극적인 사건 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은 누군가에게 지독한 지루함일 수도 있다. '재미없다'는 메마른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 특히 사색을 즐기는 INFJ 친구들과 함께라면 이 영화가 남기는 긴 여운을 기꺼이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는데, 뺨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가 무척 반가웠다. 주인공 '이' 역시 홋카이도의 설산에서 이런 공기를 마셨겠지 생각하니 묘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바쁘게 사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그저 강물을 보고 눈을 밟는 것만으로도 삶의 빈자리는 충분히 채워진다는 것을.


문득, 조만간 다시 일본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간은 영원히 독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