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내가 청소년에 가까웠을 시절에 팀 버튼의 영화 '비틀쥬스'를 봤다. 당시 저승에서 온 그 기괴한 악마의 이미지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숱도 별로 없는' 초록색 머리칼과 줄무늬 수트, 그리고 산 자들을 골탕 먹이는 그 기묘한 행동들 말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그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는데, '비틀쥬스'가 뮤지컬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보러 갔다. (나는 아내의 뮤지컬 픽은 군말 없이 따라나선다. 신뢰가 깊다.)
마곡의 'LG아트센터'를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독특한 건축물이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외벽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으이구, 너도나도 안도 다다오 흉내 내더니, 여기도 마찬가지구먼'이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따라쟁이인지 확인해 보려고 검색해 봤다. 그런데 찾아보니 설계자가 진짜 안도 다다오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나에게 딱이군.) 거장의 작품을 눈앞에 두고 짝퉁이라 치부했던 내 오만함을 반성하며, 한참 동안 건물을 감상했다. 우연히 온 장소가 안도 다다오 건축물이라니, 오늘 내가 운이 참 좋다.
건물 감상평은 뒤로 미루자. 뮤지컬 글이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공연장 앞은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다. 건물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 설계에 이런 화끈한 조명은 예상되지 않았을 테니.
오늘의 캐스팅
오늘의 주인공은 김준수 배우였다. (예전 동방신기의 '시아준수'였던 김준수 씨가 맞다.) 지난 글들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아이돌 출신 배우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다.
동방신기 시절의 앳된 얼굴만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가 이 거대하고 복잡한 극, 게다가 '비틀쥬스'라는 캐릭터를 이끌어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오로지 티켓 파워만을 위한 캐스팅 같은 거. 불안한 마음을 1g쯤 품고 공연장으로 입장했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좌석의 경사가 거의 절벽 수준이었다. 나는 3층이었는데,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저세상으로 직행해 비틀쥬스와 조우할 것 같은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 아찔한 경사 덕분에 앞사람의 뒤통수가 시야를 가리는 불상사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좋아?) 누군가의 방해 없이 오롯이 무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이는 관람의 질을 결정짓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다.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막이 올랐다.
관람을 끝낸 지금, 일단 김준수 배우에게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가 무대에 등장한 순간, 나의 편견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비틀쥬스 특유의 미친 텐션을 제 옷처럼 완벽하게 입고 있었다. 극 전체를 쥐었다 폈다 하며 관객의 호흡을 조절하는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동방신기 출신답게 춤과 노래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게다가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느껴지는 연기였다. 지난번 관람했던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쾌감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에너지가 무대 위에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다라는 표현이 좀 진부한데, 이번 공연에는 이 말이 가장 적합하다.)
나는 보통 공연 중간에 내가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하는지로 작품의 재미를 평가하곤 한다. 나름 개인적으로 중요한 지표다. 지루한 공연에서는 자주 손목을 보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단 한 번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그 기괴한 유령의 농담에 웃고,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유쾌한 방식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다. (이런 공연이라면 언제든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줄 용의가 있다.)
비틀쥬스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통해 오히려 삶의 활력을 이야기한다. 역설적이지만 가장 효과적이다. 마냥 고민만 하느라 시간을 보내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그러니 '비틀쥬스'처럼 '그냥 신나게 하면 된다'. 그저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행복하게 보내면된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좋은 인생이 된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두려움에 휩싸여 현재의 행복을 놓치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요새 어떤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애태우며 보내고 있나요?
부디, 당신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반야바라밀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