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취향을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새러데이 콘서트'를 듣다

by 이서


도반 M에게서 연락이 왔다.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평소 공연 관람을 즐기는 편인데, M의 초대는 언제나 결이 다르다. 지난번 글로 썼던 '트렁크 쇼'를 비롯해, 백화점 VIP에게만 허락된 은밀하고도 정중한 초대. 나는 M이 매년 어떻게 그 높은 문턱을 넘는지 늘 궁금하지만, 굳이 묻지 않는다. 그저 그가 건네는 취향의 덤을 감사히 누릴 뿐이다. (세상에는 내가 몰라도 되는 성실함이 있는 법이다.)


M의 제안은 늘 부담이 없다.


공연 당일 아침, M은 직접 차를 몰고 집 앞까지 픽업을 왔다. VIP의 서비스 정신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감탄했다. 강을 건너가는 M의 차 안에서 H.O.T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근황 대신 오늘 마주할 공간에 대해 짧은 기대를 나눴다. (취향이 맞는 친구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목적지는 남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는 '신세계남산'이다. 정용진 회장의 야심작이라 불리는 그곳이 대체 어떤 분위기를 머금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졌다.

땡큐 M


도착한 신세계남산은 압도적인 위용보다 단정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건물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숨어있었다. 단순히 '돈을 쏟아부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이곳은 신세계그룹이 귀빈들을 위한 '프라이빗 소셜 클럽'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기획한 장소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백화점을 넘어, 예술을 매개로 브랜드의 철학을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천박한 자본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싶었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남산'이라는 상징적 위치에 이런 폐쇄적이면서도 열린 공간을 지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내부는 현대적인 감각과 고전적인 우아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입구의 대리석 공간을 지나 목재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구성이다. 차가운 대리석과 따뜻한 나무의 질감이 부딪히지 않고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흐른다. 공간 전체를 감도는 분위기와 은은한 조도는 이곳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의 시간을 최대한 가치 있게 대접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자본이 취향을 만나면 이런 온도를 내는구나 싶었다. 참, 대단하다.


이번 공연의 이름은 '새러데이 콘서트'였다. 토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클래식의 정교함으로 깨우겠다는 취지인 듯. 공연 전, 정성스럽게 준비된 샌드위치와 커피가 제공되었다.


서서 먹는 불편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맛이 훌륭했다. 본 게임(공연)에 들어가기 전, 뇌와 위장을 적절히 예열하는 기분 좋은 의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즐기며 멋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


2층 복도를 지나다 소문으로만 듣던 거대한 빛의 뭉치와 마주쳤다. 3억 원을 호가한다는 그 유명한 샹들리에. ‘그것’이 천장에 위태롭고도 찬연하게 매달려 있었다. 과시적이라기보다는 공간의 정점을 찍는 화룡점정. 이런 압도적인 사치가 공간의 중심을 꽉 잡아주는 무게추가 된다.


드디어 공연장에 입장했다. 들어서자마자 육성으로 감탄이 나왔다. 내부 설계에 들인 공이 시각을 넘어 피부로 전해졌다. 소리의 울림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조와 앞사람의 뒷모습에 시야가 가리지 않는 넉넉한 좌석 간격이 마음에 들었다. 디테일에 집착하는 기획자의 고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런 세심한 배려 속에 앉아 있으니, 나를 이곳으로 이끈 M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공연은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피아니스트 박재홍의 연주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건반 위로 쏟아지는 그의 움직임을 바로 앞(정말 거의 눈앞이었다.)에서 지켜보는데, '접신'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아지경을 유영하며 방대한 곡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그 경이로운 뒷모습. 몰입이란 결국 자기를 지우고 본질만 남기는 과정.

보면 볼수록 멋진 공간이다


공연이 끝난 후, M과 함께 오늘 본 건물과 객석을 채운 사람들에 대해 두서없는 대화를 나눴다.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한 온도로 반응할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인생의 큰 사치 중 하나다. 그건 아무나 누리지 못한다. 굳이 수식을 보태지 않아도 통하는 편안한 안도감. 이런 공연을 보면서 나이 들어가는 것이라면 제법 근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산을 내려왔다.


좋은 공간을 소개해준 M에게 감사하다.


오늘도 잘 보고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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