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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Aug 18. 2021

주문진, 그 푸른 바다 2

2021년 8월 6일 ~2021년 8월 8일


5시 35분

20번 승강장으로 주문진행 버스가 들어 왔다.


버스가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나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은 안도감이 더 컸다. 혹시 엉뚱한 터미널, 엉뚱한 날짜, 엉뚱한 버스를 예매하지 않았을까 전전긍긍 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꼼꼼하지 않은 일처리에 대한 후회와 자책을 떨치기 힘들다.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탑승했다.

요새는 QR코드로 티켓확인을 한다. 리더기에 코드가 띄워진 휴대폰을 가져다대니, '삑, 4번 좌석입니다.' 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예전엔 기사님이 종이 티켓을 손으로 찢어서 반쪽 탑승권을 나에게 돌려주셨었지. 라고 머릿속 라떼 로직이 나에게 신호를 준다. 나이가 들수록 라떼 로직은 활성화되나 보다. 입 밖으로 출력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가방을 위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우등은 자리가 넓어서 좋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탑승하고 드디어 출발한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방 잠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눈뜨니 이미 해는 지고, 깜깜한 길을 달리고 있다.

여긴 어디지? 기사님이 정차한다고 방송 하신다. 아, 이 버스는 주문진 직행이 아니었지. 경유지 몇개를 거치고 주문진으로 간다. 중간에 몇번 섰다. 어디더라.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조그만 동네의 아담한 터미널이었다. 휴식시간은 5분, 혹은 없었다. 스페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맛봤던 강렬한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비슷한 낭만을 기대했었지만, 뭐 괜찮다.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운치 있다.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3시간 조금 넘게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문진시외버스 터미널.


동네가 조용하고 한적하다.

'터미널은 보통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하고, 주변 상권은 그에 맞춰 발달한다.' 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오가는 행인도 없다.(그래봤자 9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터미널 앞 편의점만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저녁을 못먹어서 배가 고프다. 터미널 밖으로 나와봤다. 식당을 찾아봐야겠다.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마땅히 식사할 가게가 없다. 다 문을 닫았네. 오 저기 돈가스 집에 불이 켜져있다. 들어가본다.

'안녕하세요, 혹시. ...'

'영업 끝났습니다~'

'아 네네 죄송합니다.'


조금 더 걸어본다. 뭔가 불이 켜진 상가가 있다. 로컬 치킨집이다. 들어가보니 장사를 한단다. 포장도 된단다. '한 마리만 포장 부탁드립니다.' 기다리면서 TV를 보니, 올림픽 여자 배구 동메달 결정전이 진행중이다. 아, 이래서 동네에 사람이 없는건가. 그나저나 주문이 폭주하나보다. 전화벨이 끊이질 않네.


치킨을 받아들고 나와 숙소로 가는 교통편을 생각해본다.

이미 버스는 끊긴 것 같고. 택시 뿐이다. 지역 콜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본다. 하지만 배차가 되지 않는다.

"[주문진개인] 고객님. 주변에 차량이 없습니다. 다음에 이용해 주세요."

라는 SMS메시지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절없이 울린다. 몇 번 더 시도해본다.

오! 배차가 됐다. 기다리면서 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아들과 함께 먹을 컵라면을 두개 산다. 볶음 김치도 있어야지. 그렇지. 이것 저것 손에 집어들고 계산대로 간다.

카드를 점원분께 드리고 계산을 하는데, 빵빵. 클락션이 울린다.

터미널 앞에 택시가 벌써 도착했다.

놓치면 안될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한다. 여기서 숙소까지 걷는다면 어두운 길을 40분은 걸어야 한다. 라면과 김치를 허둥지둥 대충 가방에 쑤셔넣고 후다닥 뛰어나와 택시를 탄다.


택시로 15분정도 달려서 숙소에 도착했다. 아 다행이다. 이렇게 어찌저찌 도착했구나, 험난했지만 해냈다. 얼른 들어가서 가족들도 만나고, 씻고, 치킨도 같이 먹어야겠다. 하하하.

자 계산을.. 결제를.. 택시비.. 응?

지갑을 열었는데,

카드가 없다.


아뿔싸.

아까 편의점.

급하게 나오느라 두고 온 것 같다.


기사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안좋으시다. 당황한 내 얼굴을 읽으셨나보다.

일단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가 급하게 내려와서 결제를 했다.

택시 기사분은 다음 콜이 있는지, 급하게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카드. 그거 잃어버리면 안되는데, 그거 편의점에 있는 건 맞겠지? 그 근처 길에 떨어뜨린건 아닐까? 분실신고를 해야되나, 혹시 누가 주워서 사용하면? 안되겠다. 찾으러 가야지. 여긴 택시가 잡힐리 만무한 동네잖아. 콜택시가 올 일은 없고. 잠깐, 여기서 터미널까지 거리가... 얼마더라.


아내에게 가방을 맡기고, 나는 카드를 가지러 터미널로 뛰었다.

일찍 문을 닫는 지역 특성상, 혹시 편의점 문을 닫을까봐 열심히 뛰었다. 역시 바닷가라 습하다. 덥다. 열대야라 그런지 밤이 되도 덥다. 게다가 길은 깜깜. 열심히 뛰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 계속 뛸 수는 없다. 너무 힘들다. 뛰다 걷다. 멈췄다. 반복.

도착.

30분정도 걸렸다. 다행히 편의점은 열려있다.

'안녕하세요, 아까 컵라면 두개랑 김치 사 갔던 사람인데요, 제가 혹시 카드를 두고가지 않았나요?'

'아 그거~ 잠깐만요 여기'

'감사합니다'


이미 온몸은 땀으로 범벅에,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숙소로 가는 택시가 있을지 콜택시 회사에 연락해본다.

"[주문진개인] 고객님. 주변에 차량이 없습니다. 다음에 이용해 주세요."

이제는 친숙한 메시지만 핸드폰을 울린다.

할 수 없지. 걸어야지.

그래도 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터덜터덜 걸어간다. 어이도 없고, 황당해서 웃음이 난다. ㅋㅋ.

어두운 길을 혼자 낄낄 웃으며 걷는, 온몸이 땀에 젖은 중년 아저씨라니. 누가 보면 꽤 놀랄 모습이다.

다행히 10분쯤 걷는데,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또 나에게 행운이.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거다. 그렇게 잡히지 않던 택시가 이 어두운 길을 걷는데 나에게 와 주다니 말이다. 이래서 사람은 포기하면 안된다.


숙소에 도착했다. 아들은 이미 잠들어있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당연하다. 아내는 걱정스런 얼굴로 맞아준다. 샤워를 했다. 며칠만에 하는 샤워처럼 시원하고 상쾌했다. 역시 운동 후에 씻는 게 최고다. 언제 또 이런 야간 런닝을 강원도에서 해보겠나. 좋게좋게 생각하면, 나쁜 일은 하나도 없다.

너무 힘들어서, 아까 사 온 치킨을 먹을 마음은 도저히 안들고, 컵라면을 먹었다.


아들과 아내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뭔가 버라이어티하고 정신없는 하루구나. 그래도 이런게 또 여행의 매력이 아니겠나.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그걸 해결해나가는 과정. 그게 여행의 묘미지. 계획대로 모두 다 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지. 라고 생각하며 기절하듯 잠들었다.


주문진 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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