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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Aug 15. 2021

주문진, 그 푸른 바다 1

2021년 8월 6일 ~2021년 8월 8일

재택 근무를 하면 업무량이 줄어들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늘어난다. 그래서 야근도 많이 한다.

PC를 종료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들고, 사무실 문을 나서는 명시적인 '퇴근'이라는 행동이 없기 때문에 업무의 끝을 맺기가 쉽지 않다. 집에 있기 때문에 계속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한다. 마음을 먹고 노트북을 닫지 않으면 '퇴근'하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고 되뇌이며 문서를 붙잡고 늘어진다. 저녁을 먹고도 생각이 나서 다시 의자에 앉는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늦은 밤이 되곤 한다.


하지만 많은 기업들의 오너 혹은 관리자들은 그 점을 놓치고 있다.

'재택 근무'를 하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논리로 코로나 팬더믹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출근을 시키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해볼까?

'너희, 집에 있으면 놀잖아?' 라는 논리다.

(보안 문제가 있다, 업무 환경 구축이 힘들다 등의 근거들이 볼썽사납게 붙는다.)

본인들이 걸어온 길과 마음가짐을 드러내는 불쌍하고 천박한 사고방식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새로운 세상이 오겠지. 농경시대의 근면함에 대한 기준은 이렇게 21세기에도 버젓이 살아있다. 안타까울뿐이다.


하지만 오늘은 재택 근무지만 '퇴근'을 해야한다. 5시에 노트북을 덮어야 한다.

왜냐면,

주문진으로 가는 5시 40분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들은 이미 지난 주에 먼저 떠나, 주문진에서 일주일을 생활하고 있다.

'강원도에서 2주 살기' 프로젝트.

나는 회사 일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금요일 저녁 강원도로 출발하여 합류해 주말을 보내고 나만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업무를 정리하고, 어젯밤 정리해놓은 백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2박 3일 일정이라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옷 몇벌과 모자가 전부.

어떤 여행이든 짐을 간소하게 싸는 것이 멋지고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간 내가 가진 모든 짐이 커다란 백팩안에 모두 들어가게 되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진정한 미니멀리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인생의 끝무렵에는 결국 그렇게 극도로 간소화한 소유의 모습에 이르고 싶다. 그것이 '완성'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가진게 점점 많아지는 건 별로 보기 좋지 않다.


매번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서울 남부 터미널.

들어가보는 것은 처음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느낌의 80년대 풍 건물과, 내부 시설이다. 시간이 멈춘 듯, 오가는 사람들마저 과거의 환영같은 느낌이 든다. 버스를 기다리며 김밥과 라면을 먹고, 대기실에 앉아 TV를 보는 이런 저런 사람들. 한 켠에는 시골 장터에서 볼법한 화려한 꽃무늬의 모자와 가방들을 쌓아놓고 팔고 있다. 이 건물은 언제 지은걸까? 군 시절 동서울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몇 번 타보긴 했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에도 자주 가봤지만, 이 정도로 열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래됐다고 나쁜건 절대로 아니다. 남아있을 목적이 있고, 버려져야 할 이유가 없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존재의 가치가 있는거다. 여긴 엄연히 '버스터미널'이 아니던가.


요새 시외버스 티켓 예매 시스템은 모바일로 쉽고 편하게 잘 되어있다. 좌석 결정까지 일사천리로 앱으로 결제가 가능했다. 최신 모바일 앱으로 결제한 QR티켓을 아이폰에 넣고, 80년대 풍의 시외버스 터미널 대기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묘한 사이버펑크 소설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멍하니 앉아있는데, 이제 생각이 난다.

아 맞다. 약.. (매일 먹는 약이 있는데 안 챙겼다.) 아 맞다. 슬리퍼... (주문진 해변에 가는데 슬리퍼를 안 챙겼다.) 뭐 괜찮다. 어쩔 수 없다. 며칠 없어도 상관없겠지.

이렇게, 간소화와 누락은 언제나 종이 한 장 차이로 경계를 오간다. 따라서 극도의 간소화를 추구한다면 누락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수다.


응?

5시 40분 차인데, 20번 승차장에 있어야 할 버스가 없다.

지금은 5시 30분, 출발 10분 전인데. 보통은 이쯤이면 차가 들어와서 대기, 승객을 태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나. 불안, 초조, 여기가 아닌가, 예매를 잘못했나. 이게 오늘 마지막 차인데.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모바일 티켓을 열었다 닫았다 확인하고 두리번 두리번. 매표소에 가서 시간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본다. 분명 5시 40분 출발이 맞다.


분명히 터미널 안은 에어컨 풀 가동으로 시원할텐데,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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