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피치에서 꼭 봐야 할 작품 10

르네상스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곳

by 사이
없는 돈 모아 온 여행에서 밥값 아껴가며 유명하다는 미술관에 가는데, 아는 그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그림 공부를 해 보았다. 300년의 역사가 하룻밤의 벼락치기 공부로 얼마나 커버되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아예 모르고 가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입장권 사는 줄에서라도 찾아볼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가벼운 기록으로 남긴다.


0.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에

우피치 미술관은 서쪽 건물 3층에서 시작하여 동쪽 건물로 이동하면서 관람하면 된다. 초기 르네상스, 르네상스의 절정기, 후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의 작품이 시대 순으로 진열되어 있으므로 웬만하면 관람 순서를 따르도록 한다.

사진의 왼쪽 건물(서쪽)에서 시작해서 가운데 복도를 지나 오른쪽 건물(동쪽 건물)로 이동하면 된다.


+ 내가 방문했던 2017.06.27에 미켈란젤로 이후의 작품은 동쪽 건물 3층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 특별전이 열리는 2층에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서쪽 건물 3층에서 동쪽 건물 3층으로 이동한 후에 동쪽 건물 2층으로 내려오는 순서로 관람했다.


1. 서쪽 건물 3층 2번 방:
"지금부터 르네상스를 시작하지.", 조토
왼쪽부터 치마부에, 두초, 조토의 <마에스타>

2번 방에 들어서면, 얼핏 보기에 비슷한 그림들이 걸려있다. 마리아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 그리고 그들을 숭배하는 성인들과 천사들. 누가 보아도 중세적인 주제의 그림들 속에 르네상스의 문을 여는 조토의 작품이 있다. 스승인 치마부에와 두초의 그림에 비해 조토의 <마에스타> 속 성인들은 아주 조금 더 사실적이다. (라고 한다. 사실 내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였다는 게 함정..) 마리아 양옆의 성인들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겹쳐 섰다는 점과 조금 더 부피감 있게 묘사되었다는 점이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설프기 마련인가 보다. 실망감보다는 이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되려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방으로 향했다.


2. 서쪽 건물 3층 8번 방:
수녀를 사랑한 신부님, 필리포 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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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한 고아가 있었다. 이 고아는 수도원에서 자라 수도사가 되었다. 그런데, 수도사로 평생 살기에는 재주가 너무 많았다. 그림을 기가 막히게 그리기도 했고, 여자를 기가 막히게 좋아하기도 했단다. 결국 나이 오십에 자기 그림의 모델을 서던 수녀와 눈이 맞아서 도망을 가는데 이 사람이 바로 필리포 리피다. 수도사라는 뜻의 '프라'를 이름 앞에 붙여 프라 필리포 리피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화가 덕분에 마리아께서는 아름다운 외모로 탈바꿈하셨다. 이전의 화가들이 그렸던 마리아는 단지 예수님의 어머니였지, 고운 느낌은 아니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 분이 자기가 사랑했던 수녀의 얼굴을 마리아의 얼굴로 그려내는 바람에 성화 속 마리아께서 아주 아름답고 고와지셨다. 8번 방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필리포 리피의 여러 그림 속 마리아의 얼굴이 다 똑같다. 그리고, 엄청난 미녀다. 이 수녀님은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우셨던 것인가.


3. 서쪽 건물 3층 9번 방:
포토샵보다 교묘하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중세 시대에는 개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드물었지만,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초상화의 인기가 높아졌다. 당시 우르비노의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는데, 어려서부터 용병 생활을 했던 공작은 전쟁 중에 오른쪽 눈이 먼 외눈박이였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포토샵 대신 당시 유행하던 측면 프로필을 그려 공작의 한 쪽 눈을 가려주었다고 한다. 열심히 남편 얼굴을 완성했는데, 이번에는 공작부인인 바티스타 스포르차가 사망했다. 프란체스카는 어쩔 수 없이 시체의 마스크를 본 따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림 속 아내의 얼굴이 남편의 얼굴보다 유난히 흰 것도 죽은 사람의 혈색을 보고 그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자꾸 현실보다 낫게 그리라고 하니, 화가와 사진사는 얼마나 극한 직업인지.


4. 서쪽 건물 3층 10번 방:
우피치의 <모나리자>, 보티첼리

거의 모든 방에 교과서에 나왔던 작품들이 쏟아지는 우피치 미술관이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을 딱 하나 꼽으라 한다면 아마 보티첼리의 <봄>이 아닐까.

<봄> 혹은 <프리마베라>

사람들을 헤치고,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앞에 서면 정면에 흰옷에 빨간 로브를 걸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아들 에로스가 사랑의 화살을 어디로 쏠까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프로디테의 왼 편에는 순결, 사랑,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삼미신이 서 있고, 헤르메스가 지팡이로 하늘의 구름을 휘젓고 있다. 겨울을 몰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겨울이 가고, 아프로디테의 오른쪽에서는 봄이 오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서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클로리스라는 요정에게 바람을 불고, 투명한 옷을 입고 있던 클로리스는 서풍을 맞고 화려한 옷을 입은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한다. 이들의 발아래에는 200여 종의 꽃이 그려 있는데, 놀랍게도 이 꽃들은 실제로 피렌체 지방에 피는 꽃들이라고 한다.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의 그림은 10번 방부터 14번 방에 걸쳐 있는데, 아무리 <봄>이 유명하다 해도 바로 옆에 전시된 <비너스의 탄생>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이 10등신의 부끄러움 많은 비너스는 보티첼리가 남몰래 좋아했다던 시모네타 베스푸치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빵빵한 가문으로 시집가서, 피렌체에서 가장 잘 나가던 메디치 가문의 줄리아노 메디치와 바람을 피운 대단한 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왼쪽에서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미풍의 여신 아우라가 바람을 불고 있고, 오른쪽에는 제우스의 딸 계절의 여신이 아프로디테에게 옷을 건네고 있다. 과연 보티첼리는 르네상스의 절정답게, 아름다운 아름다움의 여신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주제 선정부터 표현 방식까지 이보다 르네상스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5. 서쪽 건물 3층 15번 방:
진짜 <모나리자>의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수태고지>

다 빈치는 피렌체 근교인 빈치 마을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배우고 자랐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는 피렌체에서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우피치에서 볼 수 있는 다 빈치의 유일한 작품은 천사에게 임신 사실을 전달받는 마리아를 그린 <수태고지>이다. (하도 많이 그려진 주제여서 이게 뭐?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역시 사람이 유명하면 똥을 싸도 좋아해 준다는 앤디 워홀이 옳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림 앞에 발이 묶여 있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보통 실내 배경으로 그려지는 다른 화가들의 <수태고지>와 달리 이 작품의 배경은 실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리아는 인간의 건축물 앞에, 천사는 신의 창조물인 자연 앞에 등장하며, 멀리 있는 배경은 희미하게 표현되었다.


+내가 간 날은 레오나르도 우피치에서 다 빈치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서 이 작품이 3층 15번 방이 아니라 2층 79번 방에 있었다.


6. 서쪽 건물 3층 19번 방:
다 빈치의 스승, 베로키오
<그리스도의 세례>

내가 이번에 우피치에 가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그림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세례>이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인 베로키오의 작품인데, 예수님이 세례 요한한테 세례를 받는 장면을 그렸다. 베로키오는 이 그림의 아기 천사 부분을 레오나르도에게 맡겼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내려오고, 빛이 쏟아지고 정말 중세스럽지만, 레오나르도가 그린 아기 천사들의 표정을 보라. 중세에 천사들 표정을 저렇게 그렸다가는 파면 당했을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도는 아기 천사들이 세례식을 지루해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이를 본 베로키오는 제자의 실력에 감탄하며 자신의 붓을 부러트렸다고 한다. 스승이 제자의 실력에 감탄해 그림을 포기하다니. 제자도 대단하지만, 스승도 참 대단하다.

+특별전 일정으로 전시관이 바뀌어서 그런지 아쉽게도 나는 이 그림을 찾을 수 없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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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쪽 건물 3층 25번 방:
유일한 회화를 이곳에, 미켈란젤로
<톤도 도니>

왼쪽으로는 아르노 강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두오모가 보이는 복도를 지나 동쪽 갤러리로 건너오면 미켈란젤로의 <톤도 도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도니라는 사람이 주문한 원형 그림이라는 뜻인 <톤도 도니>는 자신을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주장하던 미켈란젤로의 남아 있는 유일한 회화 작품이다. 조각가답게 액자도 직접 만들었고, 심지어는 그림 속 사람들마저 조각하듯 그려냈다. 마리아 팔뚝이 다비드 팔뚝만 하다니. 필리포 리포가 보면 울고 가겠다.


8. 동쪽 건물 3층 26번 방: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막내, 라파엘로
<자화상>

26번 방에는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막내 라파엘로의 작품들이 있다. 라파엘로는 참으로 잘생기고, 겸손하고, 똑똑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이 가만히 두지도 않았고, 본인도 오는 여자 막지 않다가 서른일곱이라는 나이로 요절했다. 그래도 어린 나이부터 당대 최고였던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우피치 미술관에 남아있는 작품도 다른 화가에 비해 많다. 23세에 그린 <자화상>, <검은 방울새의 성모>,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를 의뢰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 면죄부를 팔아 종교 개혁을 야기한 <레오 10세의 초상>, 이외에도 고향 우르비노에서 그린 <우르비노 시리즈> 등등. 바티칸에 있는 <아테네 학당>에 비하면 그렇게 시선이 머무는 그림들은 아니지만, 라파엘로를 그냥 지나치긴 아쉽지.


+ 내가 방문했을 때, 라파엘로의 작품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특별전이 열리는 2층에 있었다.


9. 동쪽 건물 3층 27번 방:
"나 르네상스 안 해!", 매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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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을 연속해서 계속 보니 놀라기도 힘이 드는데, 다음 세대를 살았던 화가들은 오죽 피곤했을까. 기존의 화가들을 따라 하는 것 말고는 새롭게 그릴 게 없었다고 한다. 한 시대에 도나텔로, 보티첼리,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새로운 모든 것을 시도했으니, 천재들보다 늦게 태어난 게 죄인 화가들은 무기력하고 회의적인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더 나아진다는 희망 없는 그야말로 헬(HELL) 이탈리아에서 로소, 폰토르모, 브론치노, 도소, 파르미자니노 등의 매너리즘 화가들은 성모 마리아의 목을 늘리고, 불안정한 색을 사용하고, 원근법을 왜곡하는 등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27번 방에서 35번 방에서는 전교 1등의 빛에 가려 무기력함에 빠진 전교 2등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더불어 28전시실에는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인 티치아노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의 귀족 여성을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는데, 전통적인 비너스가 모두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그림 속의 비너스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구도는 스승이었던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와 비슷하지만, 시선 처리가 달라지면서 이 그림 이후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마네의 <올랭피아> 등 서양 미술의 많은 누드화가 감상자를 똑바로 직시하는 형태로 그려졌다고 한다.


+ 내가 방문했을 때, 후기 르네상스/매너리즘 작품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특별전이 열리는 2층에 있었다.


10. 동쪽 건물 3층 42번 방:
르네상스의 종말, 바로크 시대
<메두사의 머리>

모두가 무기력증에 걸렸던 매너리즘도 어느새 끝을 향하고, 운동감을 강조하는 바로크 시대가 시작된다. 정적이고, 안정된 구도를 지향하던 르네상스 작품과는 달리 격정적이고 과격한 구도를 지향하는 루벤스, 렘 브란트, 카라바조의 작품이 우피치의 대미를 장식한다. 평생 술과 노름에 빠져 살았고, 늘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카라바조는 술자리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이후 평생 동안 이탈리아 남쪽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가 결국 죄를 사면 받고 로마로 돌아가는데, 돌아가는 길에 말라리아에 감염돼 객사하고 만다. 이런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보기 싫었던지 죽기 10년 전쯤 카라바조는 눈이 마주치는 즉시 돌로 변해버리는 메두사의 얼굴을 자기 얼굴과 똑같이 그려버린다. 쳐다도 보지 말란 건가.


+ 내가 방문했을 때, 루벤스와 렘 브란트의 작품은 찾을 수 없었다. 카라바조의 자화상과 자화상을 닮은 메두사만이 2층 전시실에서 우릴 반겨주었다.


11. 나가면서

우피치 미술관의 출구로 나와 다시 시뇨리아 광장에 앉았다. 이야기의 주제가 변하고, 진짜 다비드 상이 가짜 다비드 상으로 바뀌어버렸다 해도 300년 전의 사람들도 여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비드 상을 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카리바조의 메두사와 조토의 마리아는 분명 다르지만, 어느 지점에서 그 둘도 비슷하지 않을까. 대단한 그림을 실컷 보고 괜히 그런 싱거운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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