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여행, 그냥 가긴 그러니까

내셔널 갤러리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

by 사이
굳이 그림을 보러 여행을 떠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가는 도시에 있는 유명한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자니 괜히 찝찝합니다. 막상 들어가도 아는 그림이 없으면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공부까지 하면서 다니기엔 먹고 마시고 사진 찍을 시간도 부족하죠. 그런 당신을 위해 제가 대신 공부했어요. 이왕 가는 미술관, 그냥 가긴 그러니까 알고 가자고요. 이 글을 읽는 5분이면 당신의 런던 여행이 조금 더 즐거워질 거예요.

1824년 영국 의회는 바로 옆 나라 프랑스에는 루브르 박물관, 한 때 경쟁 관계였던 스페인에는 프라도 미술관이 있는데 영국에만 아직 국립 미술관이 없다며 내셔널 갤러리 건립을 추진했어요. 국민들도 경쟁심리가 발동했는지 38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내셔널 갤러리는 영국인들의 기증과 정부의 지원으로 지금은 2,3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는 영국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크게 4개의 관으로 나뉘어 있는데요, 가장 최근에 증축된 세인즈버리 윙에는 가장 오래된 1260-1510년대의 중세에서 초기 르네상스까지의 작품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이후 1510-1600년대 작품은 서관에, 1600-1700년대 작품은 북관에, 마지막으로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동관에는 인상주의 작품을 비롯한 1700-1900년대의 그림이 전시되어있어요.


유명한 작품이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봐도 모자라지만, 여행 가서 미술관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꼭 봐야 할 작품을 딱 10개만 선정해 보았습니다.



세인즈베리 윙 중세 종교화-초기 르네상스 (1260-1510)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의 시작"
1.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솔직히 언뜻 보면 특별할 거 하나 없는 평범한 부부의 초상화입니다. 심지어 그림의 크기도 굉장히 작아서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에요. 하지만 그림 곳곳에 부부의 부를 과시하고, 결혼의 신성함, 신의 축복을 강조하는 갖가지 상징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 상징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Van_Eyck_-_Arnolfini_Portrait.jpg

일단 평면적인 종교화만 그려지던 중세의 끝자락에 부부의 초상화를 그렸다니 금수저는 금수저였나봅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에 침대를 두는 게 당시 부자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는데 역시나 신부 뒤로 붉은색 침대도 있고요. 창밖의 체리나무에 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여름인데 모피털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과시욕도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상당히 귀했던 오렌지가 굴러다니고, 신부는 금목걸이, 금팔찌도 차고 있네요.


결혼은 신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것이기에 신랑과 신부는 모두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서 있습니다. 엥? 신부의 발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아냐고요? 그림 왼쪽 아래에는 신랑의 슬리퍼가 그림 정중앙 뒷부분에는 신부의 붉은색 슬리퍼가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샹들리에에 켜진 단 하나의 촛불은 이 결혼은 지켜보는 신을 의미하죠. 벽면에는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1434년'이라고 쓰여 있어 얀 반 에이크가 이 결혼의 증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화가가 얼마나 디테일한 사람인지 벽면의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부의 뒷모습과 붉은 옷을 입은 얀 반 에이크와 푸른 옷을 입은 그의 조수가 그려져 있습니다.


거울 둘레에는 예수의 10가지 수난이 그려져 있는데요, 결혼한 부부가 따라야 하는 규범과 이상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벽에 걸린 묵주는 신부의 순결과 신앙을, 먼지떨이 솔은 살림을 잘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출산을 상징하는 성녀 마르가리타의 조각도 있고요. 심지어 그림 앞 쪽에 그려진 귀여운 강아지마저 부부 사이의 신뢰와 충성심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이유 무엇..?) 빨리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 봅시다.




"내일 아침까지 퀄리티 있게 해주세요^^"
2. 레오나르도 다빈치 <암굴의 성모>

사실 이 그림도 슬쩍 보면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그린 평범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화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요. 일단 아는 화가도 별로 없는데 그중에서도 다 빈치라니! 한번 보고 가야죠.


다 빈치는 <암굴의 성모>를 두 번 그렸습니다. 먼저 그려진 <암굴의 성모>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성모 마리아의 품에 두 손을 모은 아기 예수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아기 요한과 4대 천사 중 한 명인 우리엘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의뢰했던 성 프란체스코 교회의 수녀들이 세례를 내려야 할 예수가 무릎을 꿇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고 퇴짜를 놓았습니다.

Leonardo_Da_Vinci_-_Vergine_delle_Rocce_(Louvre).jpg
암굴의.jpg
루브르 박물관의 암굴의 성모(좌), 내셔널 갤러리의 암굴의 성모(우)

예나 지금이나 클라이언트는 무서운 존재인가 봅니다. 그 유명한 다빈치도 결국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지금 내셔널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암굴의 성모> 두 번째 버전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예수와 요한의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성모 마리아의 품에서 십자가를 들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엘 옆의 아기 예수가 세 손가락을 펼치며 요한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죠. 성화 속에서 십자가를 들고 털옷이나 누더기를 입은 사람은 언제나 요한을 의미하기 때문에 누가 예수인지가 명확해졌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그림에서 예수를 가리키던 우리엘의 손가락도 필요 없어졌어요. 과연 두 번째 버전은 한 번에 컨펌을 받았을까요? 궁금함을 안고 WEST WING(서관)으로 걸음을 옮겨봅니다.




서관 후기 르네상스 (1510-1600)


"오늘 하늘이 너무 예뻐요."
3. 티치아노 베첼리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크레타 섬의 미로에 반은 사람이고 반은 소의 모습을 한 괴물 미노타우르스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웅 테세우스가 이 괴물을 죽이러 왔고, 크레타의 아리아드네 공주는 외간 남자한테 반해 미로 푸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테세우스는 공주가 알려준 대로 실타래를 풀면서 미로로 들어가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무사히 돌아 나옵니다. 둘은 미래를 약속하며 낙소스 섬으로 도망치는데, 테세우스는 이내 마음이 변해 잠든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버립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때마침 바쿠스가 인도 전역을 정복하고 부하들이랑 낙소스 섬으로 돌아왔지 뭡니까. 바쿠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입니다. 바쿠스는 실연당해 슬퍼하고 있는 아리아드네에게 반해 포도나무 덩굴로 왕관을 만들어 청혼을 합니다. 울어도 예뻤던 아리아드네는 바쿠스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먼 훗날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디오니소스는 그녀의 왕관을 하늘로 던져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답니다.

Titian_Bacchus_and_Ariadne.jpg

티치아노는 색채를 기가 막히게 쓰는 걸로 유명한 베네치아의 화가입니다. 티치아노는 바쿠스가 아리아드네를 만나는 순간과 죽은 부인을 위해 북쪽 왕관자리를 만드는 장면을 합쳐 탁월한 색채로 그려냈습니다. 바쿠스와 부하들은 한껏 신이나 그림 속으로 행진해오고 있습니다. 포도주의 신답게 와인색 망토를 두른 바쿠스는 표범들이 끄는 황금전차를 타고 오다가 떠나가는 테세우스의 배를 보며 슬퍼하고 있는 아리아드네를 발견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바쿠스는 이미 전차에서 뛰어내리면서 왕관을 던지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새파란 하늘에는 왕관 모양의 별자리가 이미 반짝이고 있네요. 아리아드네도 갑작스러운 바쿠스의 등장에 놀라긴 했지만 그가 싫지는 않아 보입니다.




"미션 임파서블"
4. 한스 홀바인 2세 <대사들>

저 멀리 이탈리아에서 티치아노가 신화 속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얼마 후, 영국과 프랑스는 난리가 났습니다.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던 영국 왕 헨리 8세가 이혼을 못하게 한다고 가톨릭을 나와 영국 국교회를 만들어버린 겁니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옆 나라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교황청과 영국을 화해시켜보겠다고 외교관 장 드 댕트빌을 런던으로 파견합니다.

대사들.jpg

그림 왼편에 모피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는 사람이 댕트빌입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수여하는 생 미셀 훈장도 목에 걸고 있어요. 오른쪽에 서 있는 셀보는 가톨릭 주교입니다. 종교인답게 댕트빌과는 달리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한스 홀바인 2세는 귀족들의 지위와 심리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초상화를 그리기로 유명한 독일 출신 화가입니다. 홀바인은 옷차림으로 두 사람의 지위를, 중앙 선반에 놓인 과학의 산물들로 두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강조했습니다. 선반 위쪽에는 천구의, 사분의, 나침반, 그리고 해시계가 놓여있고, 선반 아랫단에는 지구본, 수학책, 찬송가, 직각자, 캠퍼스, 뮤트와 파이프 피리가 놓여 있어요. 언뜻 똑똑해 보이는 건 다 때려 넣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디테일이 살아 있습니다. 해시계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을 가리키고 있고, 지구본은 이들이 살았던 유럽 대륙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째 앞서 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과 비슷하지 않나요? 한스 홀바인 2세와 얀 반 에이크 모두 북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화가이기 때문이에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다빈치가 이끌었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는 달리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조금 더 섬세한 묘사가 도드라집니다.


한스 홀바인은 얀 반 에이크보다도 더 디테일을 살렸습니다. 기타와 비슷하게 생긴 뮤트는 조화를 상징하는 악기인데요, 자세히 보면 줄이 끊어져 있어요. 이는 신교와 구교가 싸우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뮤트 바로 앞에 놓인 찬송가 한쪽에는 구교를 대표하는 찬송가가, 한쪽에는 신교를 대표하는 찬송가 악보가 그려져 있습니다. 두 종교가 화해해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주문자 댕트빌의 마음을 홀바인이 읽었던 걸까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언뜻 지나치기 쉽지만 그림 정중앙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습니다. 해골은 보통 죽음을 상징하죠. 부와 지위, 과학적 산물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헛되다는 의미입니다. 홀바인은 해골을 찌그러지게 그려 그 의미를 슬쩍 숨겨두었고, 왼쪽 위 커튼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숨겨두어 하나님의 구원이 인생의 허무함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까지 숨겨두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지성을 강조하되 맡은 임무의 막중함과 깊은 신앙심까지 한 장의 그림에 그려내다니, 댕트빌이 이 그림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북관 바로크 시대 (1600-1700)


"그녀를 믿지 마세요."
5. 피터 파울 루벤스 <삼손과 데릴라>

종교화만 그려지던 중세를 지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르네상스와 뭐가 달라졌냐고요? 르네상스 화가들은 인간을 이상적이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모습으로 그려내곤 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완벽한 몸매와 포즈를 취하고 있죠.


반면,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은 강력한 명암대비와 뭉그러진 윤곽선을 활용해 인물을 훨씬 더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얼마나 역동적이었던지 진주가 일그러졌다는 뜻의 포르투갈어 'Baroco'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 루벤스도 빛과 어둠의 대비를 활용해 성경 속의 한 장면을 긴장감 있게 그려냈습니다.

Samson_and_Delilah_by_Rubens.jpg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삼손은 엄청난 괴력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얼마나 힘이 셌냐면, 혼자서 군인 1,000명쯤은 죽일 수 있었다고 하네요. 실제로 삼손에게 군대를 잃고 단단히 화가 난 옆 나라 팔레스타인 왕은 삼손의 부인 데릴라를 매수해 삼손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묻게 합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말해주지 않다가 결국 데릴라의 아양에 넘어갔습니다. 자신의 힘의 비결은 머리카락이며, 머리카락을 잘라내면 모든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버리죠. 그날 밤, 데릴라는 군인들을 불러 잠든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게 하고, 힘을 잃은 삼손은 무력하게 두 눈을 뽑힌 후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림 속에서 한 노파가 양초를 들고 삼손을 유혹한 데릴라의 풍만한 가슴과 잘려나가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양초의 빛이 닿지 않는 그림 뒤편에는 팔레스타인 군사들이 어둠 속에서 삼손이 힘을 잃기만을 기다리고 있고요.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언제라도 일어날 것 같은 삼손의 울그락불그락한 등짝을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빨리 일어나라고요. 하지만 동시에 진짜 깨어나면 죄 없는 일개 병사들은 무슨 죄인가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도 들어요.



간결하고 짧게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남은 그림 5점은 2편에서 소개할게요:)

2편 바로보기 ▶ https://brunch.co.kr/@dontjust/8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피치에서 꼭 봐야 할 작품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