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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Dec 23. 2022

마이너스 통장을 다 갚았는데

왜 하나도 기쁘지가 않을까?

대출을 다 갚았다

작년 6월, 오피스텔 계약금을 내기 위해 빌렸던 4,880만 원. 3% 대 후반에 만들었던 마이너스 통장 금리가 1년 사이에 5%까지 치솟았다. 학교에서 금리와 통화량, 경기 호황과 불황, 경기 순환 곡선에 대해 백날 들었지만 경제활동인구가 된 이후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마이너스 금리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어떻게 이렇게 정반대 상황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세계가 변하는 속도에 처음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고 이미 낸 빚을 안 갚고 빤스런 할 수도 없는 노릇. 1년만 고생하면 다 갚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꼬박 1년 하고도 4개월이 걸렸다. 평균 한 달에 300만 원을 갚은 셈이다. 퇴직금과 인센티브도 빚 갚는 데 썼으니 실제로는 한 달에 200만 원 조금 더 갚았겠지.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살면서 처음 내 본 빚. 다 갚고 나면 파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뿌듯은커녕 목구멍이 콱 막힌 기분이다. 왜일까. 달리 쓴 곳도 없는데 벌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저축률 때문일까. 나머지 돈을 소리도 의미도 없게 써버렸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래도 애써 모으고 갚은 돈이 사실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에 쓰였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일까.


지금 내 삶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얻고 있는 건 안정적인 월급뿐인데, 소비도 저축도 투자도 기준도 의미도 없이 그저 감정에 휩쓸려 그저 그렇게 일어나고 있다는 게 날 또 한 번 좌절하게 한다. 내가 나를 미워할 구실을 또 한 번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없이 슬퍼진다. 지금 내가 이렇게 엉망진창인 건 태생적인 문제일까, 지난 환경과 사회 구조 탓일까, 아니면 내가 만든 내 습관 때문일까. 이 의미 없는 고민을 다시금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괴롭다.


구천만 원은 무겁다

고민은 고민이고, 다시 정신을 차려 현실을 보니 오피스텔에 투자하기 전 사 둔 경기도 시골 아파트가 있다.  내년 5월이면 전세 만기인데, 친절한 호갱노노의 실거래가 정보에 따르면 구천만 원,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빚을 다 갚았는데 기쁘지 않은 건, 사실 다른 걸 다 차치하고 아직 갚지 못한 미래의 빚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일까.


만약을 대비해 마이너스 통장을 그냥 둘까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를 수 없게 야금야금 꺼내 쓰는 내 손목을 자를 수는 없어서 통장을 없애버렸다. 플러스로 돌아선 잔고는 적금을 들 수도, 예금을 들 수도 없어서 그저 파킹통장에 묻어두기로 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저 돈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저걸 가만히 모을 수 있을까. 그래도 한때는 짠테크에는 꽤나 자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직장 생활 5년 만에 월급 오르는 속도보다 목적 없이 돈 쓰는 속도가 더 빨라져 버렸나.


5개월 동안 얼마나 미리 갚을 수 있을까

망가진 (금융 포함) 생활 습관과 바닥난 나에 대한 믿음. 이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다시 노트를 꺼내본다.


3월 만기인 적금 2개와 파킹 통장에 한 달에 저축할 금액을 적는다. 그런데, '신용카드 쓰는 사람이 선저축 후지출을 다짐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다시 '한 달에 백만 원만 쓰기'부터 적었다. 신용카드 자르는 건 몇 번 시도해보았지만 유지하기 쉽지 않아서. '그리고 요즘 같은 고금리 시대에는 내 통장에서 하루라도 돈이 늦게 빠져나가는 게 이득이니까. 한 달에 기준에 맞는 곳에 딱 100만 원만 쓰기로 했다. 나머지는 비상금 1,000만 원부터 만들고 저축하기.'


아니 분명 올해 초에도 비슷한 목표를 가졌던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하지? 목표 금액을 정한다? 필요한 돈 구천만 원에 대보니 어떤 목표도 택도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고 목표를 너무 높게 잡자니 이미 지금 이 순간부터 포기하게 될 것 같고.


어떻게 하면 미래의 대출을 미리 갚아나갈 수 있을까. 잘 모르겠네. 일단 올해의 교훈은 경조사비, 사람 만나는 비용이 너무 크다. 운동은 꼭 한 달 단위로 등록하자. 그다음은...


휴. 다시 숨 한번 쉬고 포기하지 않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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