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벽두부터 꺼내보는 흑역사 뭉텅이
자소서를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연초부터 나의 대학생활을 하나하나 풀어보고 있자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남들과 다르고 싶은 줄 알았는데, 그저 남들보다 잘하고 싶었다.
나는 대학생활 내내 이 문장 어딘가에 갇혀 살았다. 남들과 다르고 싶다고 말하면서 늘 남들 하는걸 '잘'하고 싶었다.
대학교 1학년은 다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쪘던 살은 한방에 다 빼고,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서 술은 취하지 않고 잘 마셔야 한다고, 놀 건 다 놀면서 학점 관리도 잘 하고 성인이 되었으니 돈은 스스로 벌어야 한다고. 결국 1년 동안 열심히 다이어트하고, 열심히 사람들 만나고, 열심히 술 마시고, 수업 시간엔 졸다가 열심히 벼락치기하고,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2학년 1학기, 몇몇 남자 동기들이 군 휴학계를 낼 때 나도 휴학계를 던지고 도망쳤다. 글 쓰는 사촌 오빠가 있는 시골집에 일주일 정도 내려갔다 온 것, 혼자 강원도로 여행가 숙소에만 짱 박혀 캐리어 한 가득 담아간 책을 읽었던 것, 집에서 혼자 빈둥빈둥 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을 빼면 학교 다닐 때랑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가끔 학교 끝나고 찾아오는 동기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있고 싶다고 휴학해놓고 부른다고 거절 못하고 쪼르르 나갔다고 자책하고, 지키지 못할 다이어트 식단을 짜고, 감당할 수 없을 많은 계획을 세우고.
그래도 짧게나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왁자지껄한 술자리에 가는 날보다 혼자서 일기를 쓰고 잠드는 날이 많아졌고,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시발 비용'으로 다 써버리기보다는 조금 덜 벌고, 조금 덜 쓰게 되었다. 빽빽하게 채우던 시간표에 밥 먹는 시간과 가끔 휴게실에서 낮잠 잘 시간이 생겼다.
친구들도 그 술 좋아하던 김영아가 완전히 변했다고 서운해했다. 나도 정말 내가 변한 줄 알았다. 나만의 스타일이 생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람이 변하는 게 어디 그리 쉽나.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에 부모님의 정신교육 20년 착실히 받은 내가 그렇게 쉽게 '정답 있는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내 몸이 조금 덜 축나고, 내 마음이 조금 덜 힘들어지는 방법을 택했을 뿐 이번에는 '완벽한 새내기'가 아니라 '취업 잘 될만한 인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남들 다 3, 4학년에 간다는 토익 학원에 다니고, 취업 준비생이던 전 남자 친구가 듣던 한국사 인강을 열심히 들었다.
목표했던 토익 점수와 만점 받은 한국사 시험지를 들고 다른 스펙 필요 없이 공부만 하면 되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대들었다. 빨리빨리 합격하겠다고 모아둔 돈으로 학교 앞 고시원까지 들어갔다. 인강 들으면서 컴퓨터 앞에서 몇 달 깔짝이다가 아닌 것 같다고 바로 포기했다. 또 현자 타임이 왔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휴학은 안 했다.
막막했다. 대학생활 절반이 끝났는데 학교 생활과 아르바이트 말고 해 본 것도 없고, 손에 든 건 학점과 토익 점수, 한국사 자격증뿐이었다. 친구들은 경험치를 쌓아서 슬슬 인턴도 해보고, 잘하는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난 뭐 아무것도 없었다. 빨리 정답 찾으려다 늦었으니 이제라도 배우고 싶었던 거, 하고 싶은 거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포토샵 학원에 등록했다. 재능이 없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지만 재미있었다. 행정 고시하겠다고 신청했던 정책학과 다중전공도 때려치우고 배우고 싶던 경제학과 수업에 들어갔다. 해보고 싶었던 프레젠테이션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남들 앞에서 매주 발표를 하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발표를 기획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좋았다.
대학생활 3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좋은 게 생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다. 돈 주고 만든 것처럼 PPT를 만드는 친구도 있었고, 아나운서 저리 가라 할 언변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고, 논리적으로 구멍 없는 발표를 뚝딱뚝딱 기획해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난 뭐 딱 스물두 살 처음 대외 활동하는 그 수준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조급해졌다.
결국 이놈의 '빨리빨리 정답 맞히기 병'이 도져 정확하게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는지에 대답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인턴에 지원했다. 몇 번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운 좋게 학교에서 말레이시아로 보내주는 해외 인턴을 가게 되었다. 에이전트에서 물었다. "어떤 회사 가고 싶어?" 난 기획이 재밌으니까 광고 회사 가고 싶다고 했다. (기획=광고 회사라는 순진한 논리는 어디서 나온 건지^^;) 에이전트에서 물었다. "근데 너 스포츠 전공인데? 영어도 썩 잘하지 않는데?" "음 지금 학교에서 매일 아침 영어 수업 듣고 있고 허드렛일 해도 좋으니까 광고 회사 가고 싶어~"
휴... 그렇게 비행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