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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Nov 14. 2021

20대에 명예퇴직이라니! 말도 안 돼

해야 하는 것을 다 했더니, 하고 싶은 게 없어졌다.

29.9세의 가을. 뒤를 돌아보니 정말 후회가 하나도 없다. 아니 하나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지만, 나름의 목표 또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퀘스트를 열심히 깨면서 10년을 보냈다.


1. 서울대, 연고대는 아니지만 나름 당시에 가장 관심 있는 분야의 과가 있는 가장 좋은 학교에 입학했다.

2. 하지만 1년 만에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잘못했다는 것을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받아들였다.

3. 그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 스터디, 다중 전공(경제 금융학), 해외 인턴십, 학회 활동,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나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4. 그 과정에서, 나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과업(학점 관리, 과생활, 각종 자격증, 공모전 등)에도 열심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애매하게나마 잡았나?

5.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돈과 적성을 동시에 쌓았다.

6. 쉼과 고민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라고 쓰고 오랜 고민 끝에 휴식을 선택했다. 책, 영화, 뮤지컬, 사진, 그림, 철학, 심리학, 일기, 요가, 산책, 공원, 팟캐스트, 스터디, 여행 등 목적 없이 좋아하는 일도 꽤 많이 찾게 되었다. (요즘엔 그다지 재미없긴 하지만)

7.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누군가로부터 존재 자체로 사랑을 받았고, 사랑의 힘을 믿게 되었다.

8. 그 경험을 토대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만의 1년짜리 프로젝트를 했다.

9. 꽤나 재미있었고 그 프로젝트가 기회가 되어 성장하는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10. 운이 좋게 이직을 하면서 몸값도 기대 이상으로 올랐다.

11. 회사원으로서 삶에 절대 적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꽤나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12. 대단한 액수는 아니지만, 20대에 계획했던 저축 목표를 달성했다.

13. 서울은 아니지만, 내 이름으로 된 집도 샀다.

14. 그것이 계기가 되어 투자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5. 많지는 않지만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귀었다.   

16. 늘 내 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 (응 너…!)

17. (최근에 방심했지만..!) 건강한 편이다.


물론 아쉬움이 없다면, 말도 안 된다. 나의 무심함으로 떠나보낸 인연들, 용기가 부족해 외면하고 피하느라 복리처럼 늘어나버린 업보들, 다 갖으려다 더 많이 놓쳐버린 기회들. 그럼에도 나는 대체로 최선을 다해서 20대를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의 시선에서는 아쉬울지 몰라도, 그 당시에는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친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즘 널 보면,
십 년째 주사를 놓는 수간호사 마냥
영혼이 없어 보여서 슬퍼.

당황스러우면서도 듣자마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난 분명히 내가? 혹은 사회가? 원했던 것들을 많이 이루고 가졌다. 그리고 이제 인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삼십 대가 막 시작되는데, 나는 왜 초점 잃은 눈이 되어버렸나. 귓가에 '너도 복어지. 너도 복어지.' 소리가 들리는 건 왜인가. 왜 이리도 막막할까.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 나에 대해 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정상일까.


이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한다.

밥벌이도, 사회생활도,
가정도 중요하지만

종국에는 비어있는 시간과
나 자신만이 남을 거예요.

누군가에겐 은퇴한 후에
그 헛헛함이 찾아오겠지만
영아 씨에겐 그게 지금
좀 더 빨리 와버렸을 뿐이죠.


아직 부모님도 경제 활동을 하고 사회생활을 활발하게 하시는데, 명예퇴직한 29.9세라니. 남들보다 40년이나 빨리 찾아온 헛헛함 속에서 나는 어떤 시간을 채워야 할까. 어떤 의미를 찾게 될까. 어떤 목표를 가질 수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 아찔하지만, 애써 정신을 차려본다. 막막하지만, 다시, 하나씩,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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