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마지막으로 연습해보자. 할 수 있지 미토!”
하미가 힘주며 말했다. 응원을 받은 미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고마버…요.”
더듬거리며 미토가 말했다. 뜻은 몰라도, 발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관찰 가능한 실물에 대해 가르쳐 보았지만, 지칭했을 때, 미토는 정확히 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고마워요’를 외우게 한 것은 가까운 어느 날 이 말을 하고 싶어하길, 그때 이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미토에게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세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미는 미토의 손을 잡고 시장에 있는 옷가게에 갔다. 푸른 나비 안경을 낀 주인이 파리를 보듯 둘을 보았다.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소일거리로 하는 듯했다.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먼저 하미는 하와이안 원피스를 꺼내 미토의 몸에 대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도전적인 시도를 해보고 싶었지만, 역시 미토는 세록과 같은 여름 쿨톤이었다. 원피스를 도로 제자리에 넣어두고, 이번에는 민트 저고리를 입혔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푸른 민트였다. 마음에 들었는지 미토가 거울을 보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바지는 무난한 검은 면바지를 골랐다. 계산대에 선 하미는 카드를 꺼냈다. 카드에는 이무에게 받아둔 비상금이 충전되어 있었다. 결제를 마치고, 피팅룸에 들어가 미토를 새옷으로 갈아 입혔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생강 대추 케이크를 사왔다. 매장에서 먹고 싶었지만, 1인 1음료 주문이 원칙이었다. 반려체와 아아이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 조건이라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식탁에 앉아 케이크를 함께 먹었다. 미토가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오늘은 미토가 태어난 날이었다.
출생 등록 번호를 읽을 수 없는 미토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시작점을 세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제조년월일은 AS 받을 때나, 신경 쓸 번호라는 이무의 농담이 생각났다. 언젠가 미토에게 이무를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유전자의 계보 한 세대 위의 존재를.
케이크를 남김 없이 먹고 나서, 자리를 정리했다.. 집은 세록이 나가기 전과 같았고, 어제와 같았고, 어제의 어제와도 같았다. 달라진 건, 미토의 옷 하나였다. 세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하미는 궁금했다. 12시가 넘었고, 다음날이 되었다. 아직 세록은 도착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미토는 침대를 기대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이불로 미토를 덮어주고, 하미는 식탁에 앉아 청귤 향수병을 스피너처럼 돌렸다. 묵직한 무게감에 마감이 잘 되어 있어, 돌리는 느낌이 좋았다. 특히 빠르게 돌고 있는 병안에서도, 평온한 푸른 물이 마음에 들었다. 무한히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새벽 2시가 되었다. 세록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은 틀렸다고 생각해 저전력 모드로 전환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질질 끄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휘청거리고 있었다. 곧 세록이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세록은 잔뜩 취해 있었다. 얼굴은 불에 데인 듯 빨갰고, 숨은 가빴다.
“괜찮아?”
하미가 부축하자, 세록은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하미의 손에 붉은 핏자국이 묻었다. 자세히 보니, 세록의 왼손이 완전히 쓸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쁜 징조였다.
“식탁에 앉아 있어봐, 식염수 만들어서 씻겨줄게.”
“우스워?”
하미는 주방에서 소금을 찾았다. 소금은 싱크대 왼쪽 서랍에 있었다.
“내가 우습냐고.”
“네가 왜 우스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우스운 인간이야.”
그 말에 세록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거. 지겨워,”
물병에 물을 따르고 소금을 넣어, 체내 염도와 같은 0.9%의 염화나트륨 용액을 만들었다. 그냥 물보다는 덜 아릴 것이다. 보울을 아래에 두고 세록의 손을 잡아 올리고는 그 위로 물을 흘렸다. 물과 함께 피가 씻겨내려갔다.
“미토는 어딨어?”
예감이 좋지 않았다.
“화 풀고 싶으면, 나 때려도 괜찮아.”
하미가 깨끗한 수건으로 세록의 손을 닦았다.
“아니, 미토가 보고 싶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세록은 방안을 두리번 거렸다. 침대 뒤에 기대고 있는 덕에 미토가 바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좁은 방에 사각지대는 없었다. 곧 세록이 둥근 이불 덩어리를 발견했고, 발로 차 미토를 깨웠다. 갑작스런 공격에 미토는 신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이불이 걷히자, 민트 저고리가 드러났다. 화가 세록 안에서 타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얘한테 옷 사주래? 누구 돈으로?”
하미가 달려가 미토 앞에 섰다.
“걱정 마, 네 돈 아냐. 이무가 준 돈으로 내가 사줬어.”
“말했지. 쟤 챙겨주지 마라고.”
필시 지원 프로그램에서 탈락되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반려체는 반려인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 두려웠다. 혼자는 견딜 수 있다. 원래 복종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니까. 그러나 보호할 대상이 곁에 있는 상태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지나치게 자의식이 발달되었다고, 하미는 스스로 느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디해진 자아가 메모리를 꽉 채웠다. 화가 치밀어 오른 세록이 잡히는 대로 주변 물건을 던졌다. 접시, 포크, 유리잔, 의자가 날아왔다. 팔에 손상이 갔다.
우선 미토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 이 방에서 안전한 곳은 딱 한 곳이었다. 화장실. 하미는 재빨리 미토를 들어 화장실로 달려가 안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이제 방에는 세록과 자신 둘만 남았다. 세록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 다가왔다.
“비켜.”
“진정해, 세록. 한숨 자면 좀 괜찮아질 거야.”
“비키라고.”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 칼 끝이 하미의 가슴을 찔렀다. 반려인만 아니었다면, 당장 팔을 비틀어 바닥에 눕혔을 테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물리력이 아닌, 그러나 치명적인. 세록이 하미를 밀쳐냈지만, 버텼다. 칼의 밑둥으로 하미를 마구 내려쳤다. 입력되는 물리값을 고통으로 치환했다. 이걸 미토가 겪게 해서는 안 된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세록이 마침내 칼손잡이를 반대로 잡고 찍어 내리려는 순간, 하미는 주머니에서 향수병을 깨뜨리고는 세록의 코에 가져다 댔다. 진한 청귤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를 맡은 세록의 얼굴색이 검게 변했고,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바닥에 등지고 누운 세록이 허공에 칼을 휘저어 대다, 몸 위로 칼을 떨어뜨렸다. 하미는 당장 달려가 칼을 멀리 던졌다. 하미는 긴급구조 신고가 작동되지 않게 왼쪽 가슴을 팔로 뜯어냈다. 프로그래밍된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서, 하드웨어의 손상이 필요했다. 인지 기능도 함께 저하되었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을 때, 화장실 문이 꿈틀거렸다. 그걸 본 하미가 외쳤다. 열지 마!
그러나 미토는 알아듣지 못했다.
◑
헤이타에서 이무는 북헤이타호랑다람쥐 서식지 보호 경계선을 구축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북헤이타호랑다람쥐는 유난한 사교성으로 인간을 보아도 피하지 않는다. 밀렵꾼들이 자신들의 가죽을 노리고 무참히 총을 갈기더라도, 새롭게 도착해 호의를 보이는 인간에게는 선뜻 앞발을 내민다. 지능이 낮아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은 종이라도 다른 개체는 다른 성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성으로, 북헤이타호랑다람쥐는 동물학자는 물론 인류학자들에게도 주요 연구 대상이다.
이무는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신 앞으로 다가온 북헤이타호랑다람쥐를 유심히 바라 보았다. 털이 노을빛을 받아 붉은색으로 빛났다. 이 지역에서는 죽은 가족들이 북헤이타호랑다람쥐로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었다. 지금 그 전설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믿음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굳은 심지였다. 동쪽 구역을 마저 돌고 연구소로 돌아오자, 동료가 급히 이무를 찾았다. 동료는 두 가지 소식을 전해주었다.
하나는 세록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자신이 기르던 인공 반려체에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다른 소식은 불법으로 아아이를 인간으로 등록했다는 내용으로, 법원으로부터 소환장이 왔다는 것이었다.
이무는 휴게실로 가 생강차를 마셨다. 속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온기 속에서 이무는 눈을 감고 처음 세록을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친구가 예정에 없던 결혼을 하게 되어, 기르고 있던 아아이를 파양하고 싶은데, 받아줄 곳이 마땅치 않다고 했다. 이무는 선뜻 잠시 아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했다. 잠시 만나보았지만, 아아이는 매력적이었다. 영민했고,. 귀여웠다. 끓어오르는 애완욕을 참지 못했고, 기르기로 결정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아이를 기르는 걸 보육 행위로 보는 것이 기만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차마 ‘아아이’를 기를 수는 없었다. 이무는 ‘아아이’를 ‘아이’로 만들었다. 보통 인간 성체와 비슷한 크기로 만들기 위해, 성장제도 먹였다. 사랑스러웠다.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무는 세록을 입양한 것을 곧 후회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많았고, 자신 외에 다른 존재에게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인공 반려체를 사고 나서야, 겨우 죄책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나이를 먹고 어느 정도 성장하자, 아아이는 알아서 잘 컸다. 한서로 떠나기 전, 아아이는 그동안 키워줘서 고맙다고 했다. 테트리스 블록처럼 채워져야 했기에 떨어뜨린 말이었을 테다. 이무도 고맙다고 답했다. 언어 교재에 나올 법한 형식적인 대화였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잘 마무리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생명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었고, 더 골치 아픈 일들이 인생의 후반부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하미는 전원이 나갔다가, 다시 재부팅되었다. 안전 모드로 진입된 상태에서, 반려인을 되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미토는 어지럼증을 느끼면서도 조금 나아가 세록에게로 갔다. 그러고는 인공호흡을 하는 하미의 입술을 떼내고, 자신의 두 손으로 세록의 입과 코를 막았다. 하미가 미토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으로 미토가 세록의 얼굴을 온몸으로 덮었다. 얼마 안 가 하미가 완전히 작동을 멈추었다.
모두가 정지했고, 청귤 냄새만이 흘렀다. 이제 그 향을 맡을 수 있는 존재는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