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nut peach May 26. 2019

직업으로의 발레리나

블라디보스톡에서 발레 공연을 보다

직업으로서의 발레리나


기분이 상할 새도 없이 커피를 소주처럼 몸에 털어 넣고, 택시를 불렀다. 그렇다.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바로 그것. 발레를 보러 갈 시간인 것이다. 이번 여행은 대책 없이 떠나온 것이 맞지만, 비행기 표와 숙소 예약 다음으로 유일하게 미리 챙긴 것이 발레 공연 티켓 예매였다. 일단 발레 공연을 예매하고, 공연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마음대로 쓰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블라디보스톡에 머무는 기간에는 마린스키극장에서 ‘불새’라는 공연이 딱 한 번 예정되어 있어, 고민의 여지없이 예약했다. 약 3주 전에 예약했는데, 앞에서 4번째 그것도 정 중앙 자리를 6만 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예약할 수 있었다. 발레 공연장의 상석은 ‘무대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중앙’이라는 글을 읽었지만, 평소 발레를 접할 기회가 적은 나로서는 연기자의 몸짓 손짓을 1cm라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가능한 가장 앞 좌석으로 골랐다. 



공연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미리 도착하여 건물 내부를 구경했다. 발레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블라디보스톡의 공연장 시설도 매우 훌륭하다. 건물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있어, 사방에서 빛이 쏟아지듯 들어오고, 그 유리 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대교의 모습이 공연장의 분위기를 완성하고 있었다. 홀 중앙에는 겉옷을 맡길 수 있는 곳과 약간의 간식을 파는 곳, 쉴 수 있는 의자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영화관은 익숙해도 공연장은 매우 어색한 나와, 공연 관람이 일상 그 자체인 러시아인들이 한 데 섞여 있었다. 


 발레의 특징이자 좋은 점은 무언극이라는 것. 언어의 장벽 없이 그저 아름다움에 취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시간쯤 되는 공연 중 고비는 찾아오기 마련이니 미리 당충전을 해야 했다. 로비의 스낵바에서 러시아인이 즐겨 먹는다는 나폴레옹케이크를 주문했다. 누가 봐도 ‘얼음 동동 아아’와 찰떡궁합이겠지만, 역시 없으므로 물 한 병을 샀다. 나폴레옹케이크는 그 전투적인 이름과는 달리 달콤한 꿀과 캬라멜이 듬뿍 들어간 디저트로, 처음 한 입에는 ‘우와 맛있다’ 하며 눈이 번쩍 뜨이지만 두 번째 숟가락부터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달다. 그냥 ‘달다’가 아닌 ‘땰!!다’ 정도로 표현해야 한다. (왜, 우리 맛있는 귤은 ‘뀰’이라고 표현하지 않나) 



디저트는 원래 단 음식이지만, 러시아인에게 ‘달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 하지만 커피와 함께 식후 한 번쯤 먹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니까. 고지대에 위치해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인 공연장에서, 케이크와 전망에 취해 공연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그동안의 수고로움과 후회를 모두 잊게 하는데 충분했다. 


 

발레 공연을 보며 머릿속에서는 엇갈리는 감상이 맴돌았다. 작은 근육과 관절을 미묘하게 움직이며, 오직 몸만으로 수만 개의 감정을 쏟아내는 발레리나의 아름다움에 잔뜩 취했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직장인이 된 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직업으로서의 발레리나’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얼마나 비슷한 하루를, 비슷한 고통을 감내하며 반복하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그 지난한 시간에 허탈함이나 회의가 들 때는 어떻게 스스로를 다잡을까.


 부디 오해 말기를 바란다. 감히 내가 발레리나의 처지를 연민한다거나 나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사람의 눈부신 성과보다 그 과정에 대해 아주 조금은 더 생각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발레 ‘불새’는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클래식한 공연이지만, 2부는 현란한 무대장치가 사용되는 현대극이다. 1부 도입부가 다소 정적이다 보니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1부가 끝난 후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관객들이 꽤 많았는데, 내가 다 아쉬울 지경이었다. 2부는 어찌나 화려하고 역동적인지 단 1초도 지루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어와 상관없이 즐길 수 있고, 저렴한 가격에 정상급의 발레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이것 만으로도 블라디보스톡 여행의 이유는 확실하다. 



공연 중 당연히 사진 촬영은 금지이지만 커튼콜 때에는 짧게나마 촬영을 허용한다. 두 시간 내내 온 정신을 빼앗은 아름다운 배우를 카메라에 담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왔다. 


 환상의 세계인 공연장을 나섬과 동시에 택시 지옥을 만났다. 마린스키극장은 시내 중심부와 조금 떨어진 탓에 대부분 택시를 이용해 오고 가는데,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버려 택시 잡기 전쟁이 펼쳐진 것이다. 마음이 급해져 택시 어플을 켜고 목적지를 입력하려고 하는데, 어 가만있자, 나 어디로 가야 하지? 발레만 생각한 탓에 그 이후의 스케쥴은 전혀 정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일단 숙소로 목적지를 잡고 택시를 호출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대로 된 한끼의 부담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