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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ut peach May 26. 2019

독수리전망대와 내 안의 락스피릿

전망은 권력이야

내 안의 락스피릿


사뿐사뿐 우아한 발레의 여운을 좀 더 간직하고 싶었지만, 하필 택시기사님은 락스피릿으로 충만한 청년이었다. 택시 안에는 뜻 모를 헤비메탈이 울려 퍼졌는데, 혹시 보컬 가내에 우환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화가 잔뜩 나 있는 음악이었다. 기사님은 핸들 위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다리 위를 질주했다. 발레의 여운을 느끼며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리듬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까딱했던 것도 같다. 


열어 둔 창문으로 바닷바람이 내 긴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아마 백미러로 보이는 내 모습은 흡사 김경호를 연상케 했을 것이다. 오후의 누런 햇빛 아래에서 다리를 질주하며 창밖으로 보는 풍경은, 매일 퇴근길 지하철 창문으로 보이는 한강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이 시간대 하늘을 보면 이토록 황홀하구나.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감정을 여행에서만 느낀다며 새삼스러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다만 이런 마음으로 출퇴근길 핸드폰 대신 창밖을 좀 보자고 마음먹었다. 아 혼행은 이런 거구나. 별걸 다 느끼게 한다.


김경호처럼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내 안의 잠자던 반항심을 건드린 걸까? 안전제일 혼행자가 스스로 새운 ‘19시 이전 귀가 방침 가이드’는 이미 뒷전이 되어버렸다. 충동적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락스피릿이 충만한 곳, 독수리전망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님께 목적지를 변경을 요청했고,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택시비를 조금 더 받는 조건으로 승낙했다. 차가 방향을 틀어 부웅 소리를 내고 출발하는 순간 묘한 쾌감이 들었다. 


* 도대체 락스피릿과 독수리전망대가 무슨 상관이야? 라고 묻는다면 기억이 잘.. (이글스 때문이라곤 말 못ㅎ..)



전망은 권력이야


좋아하는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씨네21 김혜리 기자님이 ‘전망은 권력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로 그러하다. 전망이 좋은 공간은 생각할 기회와 에너지를 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좋은 곳에서 살고, 일하고, 밥 먹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요즘은 새로운 곳을 가면, 전망대에 가보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이드북에 의무적으로 실려 있는 듯한 전망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줄을 서서 입장료를 구매하고, 높이 올라가면 도시의 건물들이 발밑에 작게 보인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사람에 치여 올라가야 하고, 올라가자 마자 금새 내려오는 이 기계적 관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작년 다녀온 도쿄 여행 이후 그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여행을 함께한 선배는 필름 사진을 좋아해 빛과 날씨에 민감했고, 예쁜 하늘을 사진에 담기 위해 일몰 시각에 맞추어 도쿄타워가 보이는 모리타워 전망대로 나를 데려갔다. 해가 넘어갈 시간이 되니 도쿄타워 뒤 하늘이 시시각각 변했고, 잠깐만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만 해도 전혀 다른 시공간에 도착하게 되었다.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황홀했다. 마치 헤르미온느의 타임터너를 목에 단 것 같았달까. 아무튼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전망대헤이터에서 전망대러버가 되었다.


독수리전망대에 도착하니 마침 일몰시간 즈음이었다. 꽤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블라디보스톡 시내가 눈 아래 펼쳐져 있다. 게다가 왼쪽에는 바다, 오른쪽에는 대교가 서로 균형을 맞춘 채 탁 트인 뷰를 볼 수 있어 왠지 모를 해방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아침에 코앞에서 실컷 보았던 바다지만, 높은 곳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 거대한 공간이 지금은 프레임을 구성하는 레이어 중 하나일 뿐이니 이 얼마나 사치란 말인가. 


이번 여행에서는 통 나의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만큼은 배경과 나를 함께 남기고 싶었다. 삼각대는 두고 혼자 왔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포토스팟으로 유명해져 약 30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모두 들떠 있었지만, 뒷사람에게 방해될 정도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 네다섯 방 정도 사진을 찍으면 뒷사람을 위해 얼른 비켜주고, 서로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암묵적 룰이 지켜지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 날 생면부지인 상태로 서로에게 멋진 사진을 선물하기 위해 진지했다.


기나긴 행렬 뒤에 나도 슬그머니 줄을 섰고, 혼자 서 있던 여자분과 계약을 맺었다. “혼자 오셨어요? 저도요! 그럼 우리 서로 찍어줄까요? 하하” 우리는 함께 최적의 포즈를 연구했고, 서로의 사진을 부탁했으며, 각자의 핸드폰을 돌려준 뒤 쿨하게 헤어졌다. 


나와 동갑인 여자이고, 혼자 여행 중이었으며, 우연히도 같은 비행기를 탔다. 그녀는 혼자 어떤 여행을 하고 있었을까. 블라디보스톡까지 혼자 떠나게 한 그녀의 납작복숭아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상상을 해보며 그렇게 여행 둘째 날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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