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이유가 없다면, 웃지 않는 러시아인들을 보며
이런 말은 내 사주에 없는데
셋째 날은 숙소를 옮겼다. 블라디보스톡은 주말 한정 여행객이 많아서인지 주말과는 달리 월요일은 비싼 호텔도 저렴한 옵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씨리얼 한 사발로 잠을 깨우고 어김없이 막심 어플로 택시를 불렀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블라디보스톡은 막심 어플을 이용하면 택시비가 매우 저렴해 택시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한국에서는 돈이 아까워 웬만해선 택시를 잘 타지 않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매일이 호사였다. 꽤 무거운 캐리어를 싫은 내색 없이 싣고 내려주는 기사님께 고마운 생각이 들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 밖으로 이런 말이 나왔다.
“쓰파시바, 킵 더 체인지!” (Спасибо: 감사합니다)
도통 영어가 통하지 않는 러시아지만, 어쩐지 이 말만큼은 모두가 한번에 알아듣는 것 같았다. ‘킵 더 체인지’라니 이럴 수가. 이런 말은 내 사주에 없는데…. 기분만큼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었다. 물론 그 ‘체인지’라는 것이 한국 돈으로 몇백 원에 불과하지만 서로 기분 좋았으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소는 노동
마지막 날을 보낼 롯데호텔은 블라디보스톡의 유일한 5성급 호텔이다. 로비의 인테리어부터 어딘가 한국 느낌이 나고, 건물 안에 한국 식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믿음직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체크인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탓에 짐을 맡기기 위해 리셉션의 직원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쩐지 어색함이 느껴졌다. 차가운 얼굴이 디폴트인 러시아인 직원이, 대화 내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웃을 이유가 없는데 웃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 때문에 서비스직이라 해도 이유 없이 웃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기업의 호텔이다 보니 한국식 서비스 룰이 적용된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이런 기분은 한국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웃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표정이 조금만 굳어도 무례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웃지 않은 채로 친절한’ 사람들을 겪어보니 그것은 꽤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오히려 미소 가득한 직원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들은 꽤 애쓰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미소라는 디폴트 값이, 실은 얼마나 노력이 필요한 노동의 한 부분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미소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미소 짓지 않는다고 해서 친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강제하지는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핑크색을 먹어?
쇼핑몰 굼(ГУМ) 근처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젊은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가게들도 아기자기 하고 동네에서도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도 젊은 분위기에 편승해보고자 점심 메뉴는 레스토랑 대신 햄버거로 골랐다. 메뉴 중에는 핑크색 버거가 있었는데, 왠지 젊은이 같은 느낌이 들어 그것으로 주문했다.
맛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맛이었고, 그럭저럭 잘 먹던 중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음식이 핑크색이라니 좀 이상하잖아? 핑크색을 먹어?’ 놀랍게도 생각과 동시에 맛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작곡가 유희열이 ‘가지는 형광색이다. 어떻게 형광색을 먹을 수 있느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가지를 먹을 때마다 잠깐씩 멈칫하게 된다.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먹는 색이라는 걸 분류하게 되었나 보다. 아무튼 핑크색을 먹는 건 좀 이상하다.
프로의 등판
여행지에서는 배가 불러도 카페를 꼭 가야 한다. 사무실 파티션만큼이나 엄격하게 내 위장에는 디저트 배 파트가 따로 구분되어 있기도 하고, 그곳의 사람들이 일상을 즐기는 공간을 엿보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장소에 갈 때는 컨셉이 있는 그 지역 카페를 미리 찾아보곤 하며, 때로는 멋진 카페가 여행으로 이끄는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프로커피카페(proкофий)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끈 트리거 중 하나 였다. 그곳엔 정말로 ‘프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카페는 라떼아트로 유명한데, 일반적인 라떼아트가 아니다. 커피 위에 형형색색의 컬러 시럽을 올린 뒤 막대로 휘저어 무늬를 만드는 방식의 그림을 그리는 좀 특이한 방식의 라떼아트다. 색이 알록달록해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점이 또한 챠밍포인트라 할 수 있다. 여행 출발 전부터 이 무늬가 완성되는 과정이 궁금했고, 그 모습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담아오고 싶었다.
가게에 도착하자 마자 최대한 주방 바가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해 앉았다. 그리고는 프로의 비법을 알기 위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주방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프로는 철저하게 홀을 등지고 있었고, 본인의 비법을 공개하지 않은 채 커피를 만들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줌을 당겨 사진을 찍으면 비법이 살짝 보일 것도 같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혹시 아나. 등 뒤에서 해리포터처럼 주문을 외우는 것일지도.
그렇게 나는 프로의 등판을 보았다.
* 색색의 무늬는 모두 시럽이기 때문에 너무 달아 반 이상 남기고 와야 했다. 하지만 고수의 비법을 (아니 등판을) 본 것으로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