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감탄. 후 생각.
왜 이렇게 했지
두 가지 타입의 여행자가 있다. 여행지에서만큼은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 그리고 여행지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쏟으며 무언가를 찾는 사람. 나는 완벽하게 후자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성 탓이 크지만 작년 1월 한 북토크에 참가한 이후 이런 성향은 더 짙어졌다.
서점 북바이북에서 열린 <퇴사준비생의 도쿄> 북토크였는데, 디테일이 강한 도시 도쿄를 여행하며 사업적 인사이트를 발굴하는 골자의 책이었다. 세부적인 예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자가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인상 깊어 핸드폰 메모에 적어두었다.
#마케터의메모 #마메모 #퇴사준비생의도쿄
1. '아 이런 게 있네' 가 아니라, '왜 이렇게 했지?'
2. '결과물의 벤치마킹'이 아니라, '고민의 과정을 벤치마킹'
쉽게 호들갑을 떨고 빠르게 감동하는 편이라 '우와아 대애박'이란 말은 잘 하지만, 돌아보니 그 감탄이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으로 발전된 적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낯선 장소나 물건을 마주했을 때, '선 감탄 후 생각'의 과정을 거치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갈 때면 애초에 새로움을 발견할 만한 장소를 찾게 되고, 자연히 여행에 쓰이는 비용이 아깝지 않게 되었다. (합리화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다.) 그렇게 모이는 생각의 단초들이 어쩌면 마케터의 학습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여 앞으로 여행이나 소비를 통해 얻는 생각들을 #마케터의메모 (#마메모)로 남겨두려 한다.
각설하고, 올 봄에 다녀온 도쿄여행에서의 경험으로 첫번째 #마케터의메모 를 시작하겠다.
소비를 부르는 치트키 : 나만의
카키모리 문구점
'나만의'라는 단어만큼 명확한 치트키가 있을까? 기본적으로 DIY요소가 있다면 마음과 지갑이 열리기 쉽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 만듦새가 기성품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쿄 구라마에에 위치한 카키모리 문구점은 여행자가 들르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다.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져 있기도 하고 관광객들이 으례 들르는 스팟들과 인접해있지도 않다. 짧은 일정의 여행 중 카키모리를 간다는 것은 꽤 많은 다른 선택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가고 싶었던 이유는 마법의 치트키 '나만의' 노트를 만들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독 여행지에서는 기록에 대한 욕구가 커져 여행지에서 사온 노트는 더 애틋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노트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나는 '무조건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조용한 동네에 위치했지만 규모는 꽤 큰 문구점이었는데,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것은 다름 아닌 노트 부속품이었다. 나만의 노트를 갖기 위해서 우리는 아래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1. 다이어리 표지를 고른다 (색, 두께)
2. 속지로 들어갈 종이와 개수를 고른다 (무지, 세로줄, 모눈종이/ 흰종이, 크라프트지 등)
3. 종이의 방향을 정한다 (가로/세로)
3. 부속품을 고른다 (스프링, 열고 닫는 방식, 펜꽂이 여부 등)
4. 직원과 상담을 통해 견적서를 작성한다
5. 결재 후 노트 제작 시간 약 40분을 기다린다
1~4단계까지 오는데에도 약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선택지가 많다 보니 고민을 거듭해서 이기도 하고, 점원과의 상담이 꽤 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직원은 단순히 장바구니 속을 계산하는 캐셔가 아니라 나의 선택지를 하나하나 재확인하고, 조언해주는 컨시어지에 가까웠다. 그녀는 나의 선택지를 하나하나 재차 확인하고 조언을 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내 노트가 단순히 무작위의 조합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최상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라 노트를 수제로 제작하기 때문에 약 40분을 추가로 기다려야 했다. 별 수 없이 문구점을 구경하며 기다렸고, 벽면에 걸려있던 홍보 포스터를 발견했다.
'나만의 잉크 만들기, 도보 7분 거리의 카키모리 잉크스탠드'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여기까지 왔는데 잉크를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근처에 위치한 잉크스탠드 바이 카키모리 지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잉크체험실은 얼핏 과학 실험실 혹은 조향사의 아뜰리에 같은 분위기를 준다. 벽면에는 다양한 컬러의 잉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잉크의 색의 구성과 함께 그 색과 유사한 색을 가지고 있는 물건을 함께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보라색의 잉크는 보라색 꽃과 함께, 붉은 갈색은 낙엽과 함께 전시하는 방식이다. 벽면을 가득 매운 여러 가지 색을 보고 있자면, 나도 꽤 괜찮은 색을 만들고 싶다는 왠지 모를 승부욕(?)이 생긴다.
잉크 만들기 체험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약 30~40분의 제한 시간이 주어진다
2. 기본이 되는 잉크 2~3가지를 골라 작은 컵에 매우 소량씩 조합해본다
3. 만년필 모양의 뾰족한 유리 막대에 조합한 잉크를 찍어 종이에 적은 후 색상을 확인한다
4. 유리 막대는 물에 헹궈 씻어내고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2~3번을 반복한다
매우 간단한 원리이지만 생각보다 원하는 색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두세 가지 색이 비율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여서 당황했는데, 그 과정이 정말 즐거웠다. 포토샵이나 일러가 아닌 찐(?) 색상들을 레이어가 아닌 종이 위에 풀어내는 일들은 내 일상에서는 경험할 일 없는 것들이니까.
맘에 드는 색을 찾아 조합 비율을 직원에게 알려주면, 같은 비율을 적용해 한 병의 잉크로 만들어 포장해준다. 그 잉크 안에는 난수번호가 들어있는데, 일종의 시리얼 넘버다. 이 비율 정보를 저장해두고 있다가, 나중에 이메일을 통해 추가 주문을 하면 언제든 내가 만든 색을 똑같이 계속 주문할 수 있는 것이다.
잉크를 사용할 수 있게 속이 비어있는 펜도 구매할 수 있는데, 이 마저도 볼펜, 붓펜, 만년필의 다양한 형태 중 고를 수 있다. 내가 만든 잉크를 원하는 굵기와 질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카키모리문구점에서만 반나절을 꼬박 보내고, 꽤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누군가는 꽤 아까운 선택이라고 하겠지만, 그 시간 동안 어떤 관광지를 가도 이토록 오래 남을 기억은 얻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케터의메모 #마메모 #카키모리문구점
1. 소비자에게 즐거운 고민의 여지를 주고 그 과정에서 물건과 장소, 브랜드에 대한 애착을 만든다 : 그 노트와 잉크는 꽤 아끼게 될 것이고, 나는 카키모리라는 문구점을 오래 기억할 수밖에 없다
2. 꼭 사야 할 이유가 없다면, 체험으로 풀어야 한다
: 체험이 아니었다면 나는 잉크에 평생 관심 한번 갖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3. 캐셔가 아니라 컨시어지다
: 계산은 키오스크도 한다. 직원은 '네 의도대로 잘 만들어 줄테니 걱정 마'의 안심을 주는 존재다
4. 시리얼넘버라는 믿음
: 같은 잉크를 또 주문할 확률은 아주 낮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공고히 하기에 충분했다
문구점에서의 보낸 꽤 로맨틱하고도 학구적인 경험, 잊지 못할 여행의 기록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