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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Jan 01. 2023

똑똑, 문 열어주세요.

우리 집에 코로나19가 찾아온 날

제목만 적어놓고 10개월 만에 코로나19 확진일기를 쓴다. 


2022년 3월 대선 전 후 

남편과 나의 직장에서는 여기저기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들리는 확진 소식과 기침소리는 

영유아를 둔 가정의 일원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격리가 무섭다기보다 

아이들에게 코로나19가 어떤 식으로 작용될지 

나와 남편은 백신이라도 맞아 증상이라도 약할진대 

그 작은 몸으로 바이러스를 그대로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의외로 아이들은 가볍게 지나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분명 예외는 어디서든 존재했고 그게 내 아이가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쁜 공휴일,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난 못 마친 일을 하기 위해 사무실로 출근했다. 

함께 출근한 동료들에게 어느 부서에서 확진자가 몇 나왔다 

우리 부서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지금 가족 중에 몇몇 나오지 않느냐 등등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없던 바이러스도 생기는 듯했다. 


다음날부터 내 몸이 아파졌다. 

남들 노는 공휴일에 놀지 못하고 일한 억울함 때문인지 

몸살기에 기침에 목이 참 아팠다. 


증상이 있으면 검사하고 출근하라며 회사에 준 신속항원키트를 

급히 써보니 음성.

어차피 출근과 상관없이 애들은 등원을 해야 하고 

어린이집은 회사 앞에 있고 등원한 김에 그냥 출근한다는 

문자를 남편에게 남기고 회사를 갔다 


자고 일어난 직후는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꾸역꾸역 회사에 앉아있으니 또 별거 아닌 가벼운 감기 같았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퇴근 후 다시 한번 검사 역시 음성. 


다음날 또 등원시키는 김에 출근을 했다. 

몸은 급격히 안 좋아졌다. 주변에서 다들 코로나19 아니냐고 물었지만 

음성이라 출근했어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 사이 우리 부서는 2명이 확진이 되었다. 2명 다 가족 간 확진. 

애들 하원시간이 다가오자 남편에게 연락했다. 


"몸이 갑자기 안 좋아. 검사 두 번 했는데 음성인 거 보니 감기몸살 왔나 봐.

 애들 하원 좀 부탁해, 병원에서 수액이라도 맡고 집에 갈게" 


퇴근 후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증상을 말하고 수액을 맞고 싶다고 하자 검사가 필수라고 했다. 

의도치 않게 강제로 끌려간 검사실. 1분도 채 되지 않아 확진이라며 

pcr검사를 권유받았다. 

늦은 시간까지 검사를 해주는 우리나라의 방역 시스템에 참 감사했다.  


pcr 검사를 받고 택시를 타는데 어쩜 이렇게 택시 아저씨에게 미안한지 

이 분은 무슨 죄인지.. 별의별 감정이 다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한참 애들 밥 먹을 시간이라 핸드폰 볼 여유 따위는 없었을 테지만 

나에겐 그런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 또한 없었다. 

결국 친한 언니가 아파트 관리실로 전화해 인터폰을 받아서야

남편은 나의 반(?) 확진 사실을 알게 됐다. 


무사히 집으로 들어와 격리하면서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는 걸 이해 못 하는 애들의 칭얼거림과 

애들도 간염 됐으면 어쩌지.. 아니 사실 내가 확진이면... 애들은 무조건 확진일 텐데 

어젯밤에 애들이 울어도 따로 자는 거였는데.. 하며 후회로 하루를 꼬박 새웠다. 

설상가상 둘째가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다음날 난 확진 문자를 받았고 

남편과 두 아이는 동거인 확진으로 pcr검사를 받았다. 

폭발적인 확진으로 인해 몇 시간이나 기다려서야 검사받고 돌아온 애들은 

다음날 확진 판정을 받았다. 


나의 안방 격리는 그렇게 끝나고 

음성이 나온 남편에게 혼자 있으라 권했지만

어차피 종일 애들과 같이 있어 의미가 없다며 거절했다. 

남편 역시 다음날 확진 문자를 받았다. 


아이들은 증상은 확진 당일부터 무섭게 나타났다 

갑자기 열이 40도를 치고 올라갔고 

해열제를 먹어도 그 효과는 미비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두 아이가 거실에 나란히 누워 쳐져 있었다. 


밤이 되자 둘째는 축 쳐진 채 물조차 힘들게 먹었고

해열제는 여전히 효과가 없었고 

119에 전화해 조언도 받아보고 병원 갈 방법을 알아봤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결국 새벽 내내 아이를 벗겨놓고 미온수 찜질을 해서야 38도 정도로 떨어졌고 

그제야 아이는 잠들었다. 


다음은 첫째였다. 열은 비슷하게 올랐지만 둘째가 워낙 쳐져있어 크게 신경을 안 쓴 사이 

둘째가 열이 내리고 나서야 첫째의 붉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39도로 몇 시간을 버틴 첫째도 벗겨놓고 미온수 찜질을 하고 체온을 떨어뜨리고 나니 

아침이 밝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언제 열이 났냐는 듯 

무서운 속도로 컨디션이 회복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대단한 체력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나와 남편의 증상은 지속되었다. 

난 기침으로 누워서 잘 수가 없었고 목은 목감기와 다른 느낌의 불편함으로 

나를 괴롭혔다. 굳이 표현하자면 바늘을 여러 개가 목구멍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계속 목이 불편하다고만 했다. (표현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 딱 이 정도만 말했다. ) 


나의 격리기간 7일 + 2일 후 남편 확진으로 인해 9일 만에 격리에 해제되었다. 


큰일 없이 끝났지만 아이들 열이 무섭게 오를 때는 

코로나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현실이 참 비정하게 느껴졌다. 

아파서 가는 곳이 병원인데 그 병원은 가지 못하게 하고 

비대면 진료는 여차저차 미뤄져 아침 9시에 전화를 했지만

오전 진료가 끝나는 1시가 다 되어서야 의사 선생님과 통화가 되었다. 

약국에서 약은 퀵서비스의 사정에 의해 저녁 늦게야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아이들의 컨디션은 돌아온 상태에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처방받는 것이라 

다 알겠다고 하고 받아들였으나, 아마 고열이 지속되는 상황이었으면 

아마 전화기를 붙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우리 집을 다녀간 코로나는 

다행히 다시 우리 집을 찾지 않았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7일 격리가 유지될 때 걸려야 하는데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다시 받고 싶지 않은 손님이다. 

나로 인해 우리 집 코로나가 시작되었다는 미안함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고 

벌겋게 달아올라 아무것도 못하고 눈물만 찔끔하던 아이들의 얼굴도 

아직도 아른거린다. 


이제 계절감기의 수준으로 인식되는 코로나19

계속 이렇게 소소한 감기 수준으로 머물렀으면 좋겠다. 

[강력한 변이 코로나19가 온다]라는 식의 기사를 볼 때마다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그만... 

벌써 2023년이다.  코로나19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반코로나 23으로 확실한 치료제가 나와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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