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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딘 Oct 07. 2022

내 세상의 끝을 마주하기 위해

DAY 120 힘들 땐 모로코 사막에서의 밤을 떠올린다

힘들어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밤에는
모로코 사막에서의 밤을 떠올린다.
얼어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분 자고 깨고 오분 자고 깨며
발목이 아프도록 몸을 웅크린 채
해가 뜨기만을 기다린 그 밤을 기억한다.
 그 밤에 비하면 오늘은 아주 괜찮다.
썩 버틸만하다.

그들의 문화를 스쳐온 3대 크리스마스 마켓 투어, 찬란한 파리에서 일주일, 앞으로의 10년을 다짐한 이스탄불에서의 새해, 정치학도들이 수다를 멈출 수 없던 아테네까지 길었던 여행에도 끝이 보였다.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모로코 마라케시.


마라케시 시장을 다니며 가격을 흥정하고 다음날 새벽에 바로 떠난 4일간의 사막 투어는 쉽지 않았다. 어딘지 모를 마을에 내려서 비현실적 풍경에 압도당하고 정체 모를 모로코 음식을 먹고 언제 내릴지 모를 차에 타면 다시 어딘가 내리기를 반복. 그렇게 이틀을 꼬박 달려가야 만날 수 있는 사하라, 올 때는 하루 만에 돌아오는 고된 일정이다.


생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낙타에 앉아 보는 끝없는 모래언덕과 여전히 아름다운 해질녘, 그리고 낙타 위에 앉은 내 그림자를 볼 때. 자연 앞에 미미한 나의 존재를 느낄 때. 지난 어제와 다가올 내일이 무의미해지고 그저 지금이 영원할 것 같던 때.


그때 알았다. 유럽이 나에게 꿈의 공간이었다면 사막은 꿈에도 없던, 내가 그어놓은 내 세상 밖의 공간이었다.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거나 우주정거장에서 물을 마시는 거나 나랑 다른 세상 얘기라고 생각했다. 꿈꾸던 유럽을 지나 모로코에 와서야, 사하라를 밟고 서서야 무의식 속의 내 한계를 깨달았다.


손으로 만져도 실감이 나지 않는 사하라였다.

2020년 1월 8일

무의식적으로 내가 규정해온 내 세계는 유럽까지도 안될 만큼 좁았고 그 세계 안에서 좁은 생각만 해왔던 것이다. 앞으로도 좁게 살겠냐고 물으면 그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나도 모르게 그어놓은 나의 한계들을 부지런히 찾아서 하나씩 넘어가야겠다. 그것이 내 남은 인생의 의미가 될 것이다.


나는 이제야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나는 나의 내면보다 더 무능하다. 의식은 무의식보다 느리니까. 의식은 고민하고 무의식은 흘러가니까. 늘 무의식은 한 발 앞서간다.


나는  무의식이 그어놓은  세상의 범위를 깨닫기 위해 모로코에 갔나 보다. 가지 않았다면 모르고 살아갔을,  세상의 끝을 느끼기 위해 사막에 갔나 보다. 고백하자면 모로코에 다녀온  2 반이 흐른 지금까지,  다른 경계를 만나지 못했다.  세상의 끝을 느끼고  너머를 보는 것에는 4일의 사막투어만큼 고된 여정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린츠로 돌아와서 한동안 잠이 많았다. 누군가는 깨어있는 시간의 의미를 잃어갈 때 잠이 많아진다고 말한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잠이 쏟아지는 날들. 깨어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스스로에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의 결론일까. 마지못해 반복되는 일상의 무의미를 무의식이 먼저 깨달아서 날 잠들게 하는 걸까.


깨어있는 시간을 알차게 써야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 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p.21


내 무의식이 정해놓은 내 한계를 만나기 위한 삶은 내면적 목표를 찾으려는 노력일 수 있다. 외면적 목표가 내면적 목표를 파악하는 것이 되는, 결코 이뤄낼 수 없음을 알기에 도전적이고 추구할만한 그런 목표.


영화는 관객에게 주인공의 내면적 목표를 응원하게 만든다. 주인공이 전투에서 살아오는데 온 힘을 다하면 그 안에서 주인공이 내면적 목표를 이루는 데 성공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소중한 사람의 의미를 깨닫고 돌아오는지, 혹은 동료의 배신을 눈치채고 권선징악을 실현하는지는 관객이 알아봐 준다.


그러나 내가 주인공인 영화의 관객은 나뿐이니까. 내가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를 이뤄내는지, 애초에 그 목표가 무엇인지 충분히 살피며 살아야 한다. 그러다 언젠가 내 세상의 끝을 만나는 것, 그래서 그 너머를 꿈꿀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내 여남은 생의 의미가 아닐까. 언젠가 사하라의 노을 아래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그것이 내 남은 인생의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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