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화 Jul 03. 2022

[배우일기] 단지 잘하고 싶다 (2)

믿음에도 학습이 필요하다

요정의 워크숍에는 낯선 얼굴도 있었고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내가 워크숍에 신청서를 보내고 머지않아 후배들 SNS에 우르르 워크숍 참여를 독려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싶으면서도 제자도 많고 평판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명히 아는 얼굴이 있을 거라고도.


정원은 총 10명이었는데 그중에 5명이 동문이었다. 반갑기도 했고, 학부생일 때 공연을 통해 연기를 많이 보여주진 않았던 터라 후배분들에게는 거의 처음 보여주는 연기가 되어서 살짝 어색하기도 했다. 게다가 완성된 연기가 아니라 수업을 하는 것처럼 과정을 보여주게 될 테니 긴장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번이 첫 주라서 오리엔테이션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선행되었다. 자기소개로 이름, 나이, 사는 곳 그리고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까진 무난하게 이야길 하고 더 무엇을 말해야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나의 일주일 패턴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아, 자기소개는 늘 어려운 거 다들 아시죠..?) 지금 복기해서 돌이켜보니 내가 이런 걸 말했었네, 싶은 게 나의 생활패턴이 나를 제일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런 게 나였는데 왜 나는 오늘에서야 나를 제대로 소개했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나를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별 것 아닌 아이템을 하나 또 찾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내내 일을 하고요. 낮에는 카페 아르바이트, 저녁에는 물류센터를 나가요. 그리고 목요일은 유일한 휴무예요. 금요일은 제일 바쁜 날인데 오전 10시에 매체 연기 가르치시는 액팅 코치 선생님을 뵈러 가고요, 3시에는 액션 아카데미를 가는데 중간에 비는 시간에 프로필을 돌려요. 그리고 액션 아카데미에서 수업이 끝나면 제가 좀.. 많이 속상해서 환기시킬 무언가가 필요해요, 그래서 무조건 공연을 보러 가요. 아니면 친구를 만나거나 영화를 보거나, 이렇게 워크숍을 오거나 금요일 저녁엔 바로 집으로 가지고 않고 무조건 일정을 만들어요. 주말에는 둘째 언니가 중국어 전공이라 언어 특기 개발을 위해서 중국어 수업을 듣고요, 일요일 낮에는 동기들이랑 연기 스터디를 하고 저녁에는 제가 학생 한 명을 가르쳐서 그 친구와 레슨을 합니다.'


'... 이게 진짜면 너무 빡세게 사는데?'



요정님은 특유의 희한한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들으면서 생각을 하다가, 넌지시 첫마디를 이렇게 던졌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즐겁게 하냐, 라는 질문에는 '자극'이라고 대답했다. 더불어 그래서 지금 역시 즐겁다고도. 요정의 워크숍은 분명히 내게 자극이었다. 그것도 아주 진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가능한 내가 꽉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은. 무엇보다 새로운 걸 배우면 배울수록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 섞이면서 한번 더 새로운 것, 혹은 진짜로 원하던 것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고, 나는 그것이 조합되고 깨닫는 경험을 워크숍을 통해 할 수 있었다.







1)

액션 아카데미는 수업을 듣게 된 지 곧 네 달이 되어간다. 첫 수업을 들었을 땐 정말 미치도록 재미있었다. 재밌어서 마스크 뒤로 몰래몰래 웃었던 기억이 분명하게 난다. 그리고 네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이고 지옥이다. 이제 흥미는 지나갔고 하찮고 못난 내 몸뚱이를 오랫동안 지켜봐야 하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자신감' 자체가 모자라게 태어난 사람이라 (아니면 그렇게 길러졌거나) 이 가늘고 얇디얇은 손목으로 거구의 남성을 한 방에 물리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럴듯하게 연기 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미치도록 수치스럽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마치 아이돌 엔딩요정처럼 나는 한 차례 얇은 주먹을 내지르고 나면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가수에게 연기를 가르쳤을 때 연기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는다거나 수준 이상으로 잘하는 것도 컨셉과 척으로 점철 된 음악방송 무대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컨셉과 척에 능하면서 보통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쳤으니 무엇을 못할까. 수업의 한 달 동안은 재미있었고, 두 달 동안의 어느 날은 집에 가면서 울었고, 어느 날은 화가 났고, 어느 날은 원망스러웠다가 어느 날은 울음을 참았다. 세 달 째엔 용기도 사라지고 연기도 못 하겠고 액션은 더 못하겠어서 마인드를 바꿨다.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의 지난 연습 일지에도 죄다 '자신감 부족'이 문제라고 쓰여 있었다. 2015년 입시생 시절에 쓴 일지에도, 2019년 대학 4년 때 쓴 일지에도 '자신감 부족'이라는 단어는 유령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리고 2022년 대학을 졸업한 지 3년 차에 접어든 지금 여전히 나는 자신감이 부족하다. 단지 액션은 '합'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웃겨 하고, 민망해하고 부끄러워했다. 마치 서울체크인의 이효리가 '연기를 하는데 몰입이 안되서 자신은 너무 웃기고 민망해 못하겠더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래서 할 수 없다고 생각을 바꿨다. 그냥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만큼만 하자고. 못 따라가겠으면 따라가지 말고. 못 하는 건 하지 마. 대신 할 수 있는 건 하라고. 그러니까 내가 모자라서 오늘 수업의 전체는 못 따라가겠어도, 수업은 나갈 수 있으니까. 가기 싫어도 꾸역꾸역 그곳에 가자. 그냥 가보자.


그 이후 나는 '수업공간에 나간다'라는 정말 아주 작은 목표만 해냈고, 어느 날엔 '합을 끝까지 외우기만 하자'와 같은 마음으로 초보자인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몰아붙이는 대신, 오늘도 나왔구나? 라는 식으로 한번 더 칭찬을 하고 넘어가는 식으로. 그리고 이제는 아주 조금씩 전과 같은 민망한 마음이 사라지고 있다.





요정의 워크숍 초반, '드렉'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요정님의 학교에서는 1학년 때 무조건 드렉 분장을 하고 뽐내는(?) 수업이 있었다고 했는데, 모든 동료들이 그 수업을 엄청 강조했더란다. 연기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무슨 도움이 그렇게 되냐고 물으니, 그 수업을 한 번 듣고 나면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란다.


위와 같은 의미이자 아주아주 비슷하고 약소한 느낌으로 액션 수업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된다. 첫째, 순간적으로 강한 힘과 힘 없이 풀어놓은 상태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신체훈련을 한다는 점. 둘째로 외부의 공기가 내부로 들어갔다가 나갔다가, 약 세 시간가량 무한히 돈다는 것. 셋째로 내가 잘 못하는 것, 즉 민망한 자태나 연기를 견디는 합을 매번 한다는 점에서다. 셋째는 워크숍 내 '드렉' 담화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워크숍이 종료될 즈음, 워크숍을 함께 들은 배우분이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에는 매번 낯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어려웠는데, 이것도 익숙해지나보다. 새로운 사람과 눈을 마주쳐도 어색해하지 않고 편안해진 게 느껴진다.' 라고 말씀을 하셨고, 요정님은 '아주 훌륭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속으로 아주 격한 동의와 찬사를 보냈다. 나도 더 낯설고 민망한 연기가 내게 요구되더라도 오늘의 경험으로 그때가 편안해지길 바라면서.  


중요한 건 자신감도, 척도, 컨셉도, 민망함을 버티는 뻔뻔함도, 눈을 마주치는 것도, 익숙해지는 것도, 나를 믿는 것도, 믿는다고 또 믿는 것도,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계속

작가의 이전글 [배우일기] 단지 잘하고 싶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