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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화 May 15. 2024

영향받기 (1)

스냅백에 검은색 후드티 그 뒷모습에 감사!


아침, 이미 지각인데

뛰고 싶지는 않아 마음만 뛰고

허벅지는 무겁게 가라앉은 채 걸었다.


겉보기엔 느릿, 여유롭고 차분한 신체.

눈은 흘깃, 스마트폰 속 지하철 도착시간을 연신 바쁘게 확인하고, 갈까 말까 뛸까 말까 생각은 시끄럽고 마음은 무거운 사람. 시도 때도 없이 들쑥날쑥 대는 무력감에 매일 같이 지던 날들.


덩달아 곧 이을 죄송함에 더 괴로워지는 중이면서,

그럼에도 내어지지 않는 의지에 포기하려는 찰나

멀리서 누가 막 달려온다.

언뜻 보아도 내가 바라는 것을 바라는 사람.

그가 나와 같은 지각인지, 단지 아쉽게 놓치는 지하철을 기어코 잡으려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애진작에 포기한 2분 남짓 남은 그 지하철을 반드시 타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우와 가볍다. 뛰는 폼이 가볍다.

저 사람은, 의지가 있네. 나랑 다르게.

사람이 아니라 의지가 달려온다.

에너지의 형태가 사람으로 달려온다.


갈림길에서 마주친 에너지의 본체가 나를 흘깃 보고는 오로지 자기만의 목표를 위해 앞으로 뛰어갔다. 홀린 듯 눈으로 뒷모습을 좇아가다 …따라 해보고 싶다- 마음에 이채가 돌면서 충동이 일어났다.

사라져 가는 신체를 따라 뛰었더니 무겁다고 여겼던 내 허벅지가 가볍다는 게 느껴졌다. 어라. 이게 아닌데. 어—라 이게 아닌데! 세포가 일어난다.


아! 영향을 받는다는 게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지.

사소하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의 하루에서 다수의 교차되는 만남 속 내 유일한 영향 아니었나? 일 분만 덜 되거나 더 있어도 못 만나는 영향. 가끔 지독하게 짜증 나는 순간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야 낫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딱 이 순간이

내가 살아있는 것들에 감복한 사랑을 느끼는 순간. 스러져가는 내가 우연히 만난 교차선에서 대가 없이 일으켜질 때.


지각을 면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내 정신이 차단한 내 에너지가 실제로는 내보내는 순간 실재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내 지척에서 늘 대기 타고 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늘 낚아채는 사람만 될 수는 없겠지. 매일 달라지는 순간에 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알아채는 사람이 된다. 낚아채는 것만이 유능한 줄 알고 살다가 알아채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 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 세상과 사랑에 빠진다. 매일같이 지던 날들에도 내가 살 수 있는 나의 실낱같은 희망. 이것이었지. 어떻게 해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 맞다 아니다를 넘어 될 수가 없는, 정확히 0에 수렴하는 가능성. 문밖을 나서면 수많은 교차선에서 마음껏 영향을 누릴 수 있다고, 나는 얼마든지 무언가를 받는다고.


따라 뛰면서 스치는 바람에 기분이 좋다. 그 뒷모습을 코앞까지 따라잡으면서 그가 뛰는 패턴, 그 형태를 눈으로 익혔다. 역사로 내려가는 유일한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하자 따라잡은 내가 그 사람 뒤에 섰다. 기분 좋게 둥둥 대는 가슴뼈 안쪽, 관자놀이, 검지 끝의 지문 주름대로 간질대는 박동. 심장에서 뻗쳐 나와 부풀어대는 갈비뼈 안쪽과 쇄골 안의 에너지과 늘어나는 근육들. 1인 에스컬레이터라 얼른 내려가야 하는데, 늦었는데, 하며 오도 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방방 뛰는 뇌가 여실히 보이는 뒤통수. 언제 이런 반가운 재미를 만났더라.


나와는 반대 노선으로 사라지는 그 사람의 뒷모습에 작게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지각 safe!

그리고 나도. 오늘, 덕분에 안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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