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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일 May 11. 2018

중국과 북한의 관계 변천사

한반도 평화와 중국의 역할

1.
과거 '중국 내전' 당시 공산당의 주력 부대는 홍군이라 칭했고, 그 홍군은 만주의 팔로군에서 비롯되었다. 팔로군은 일본의 최정예 육군 부대인 관동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 팔로군의 소속된 병사들 중에 상당수는 조선인들이었다. 또한 김일성이 지휘하는 백두산 유격대와 팔로군은 함께 항일 전투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2.
일제가 패망하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을 벌였는데 장제스의 국민당은 압도적인 미국 화력의 지원을 받았고 때문에 초기 전투는 공산당의 열세였다. 소련 마저도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도움에 소극적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중국 공산당에게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준 곳이 바로 북한이었다.


당시 북한은 이미 국가의 형태를 갖춘 상태였는데 일제가 패망하면서 두고 간 소총 10 만정과 탄약을 마오쩌뚱의 홍군에게 아무 조건 없이 지원해 주었다. 당시 그 소총들은 '북한군 전력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인지라 북한 내부의 반대가 적지 않았음에도 김일성은 쿨하게 무상 지원해 준 것이다.


3.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은 '일진일퇴'의 치열함 속에서 승패의 향방은 동북지역의 전투에서 비롯되었는데 (미국의 지원 탓에) 국민당의 화력이 절대적 우세였지만 대신 공산당은 부상병 등을 치료할 수 있고 지친 병사가 휴식할 수 있는 후방인 북한지역이 있었다.


국민당의 화력적인 우세보다는 전후방을 오가면서 로테이션을 해 가면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전술적 유리함이 홍군이 이기는데 크게 작용했다. 심지어 북한에서는 후방에서 의료지원까지 해 주었다. ‘화력의 열세’를 ‘보급의 우세’로 뒤집은 셈이다.


4.
이런 이유로 마오쩌뚱과 김일성은 전장에서 맺어진 전우애를 공유하는 형제 수준으로 끈끈했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참전 이유도 당연히 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 덕분이고, 60년대의 북한은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 중에 하나였는지라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였다. 반면 70년대까지 한국과 대만이 끈끈했다.


5.
그 끈끈한 관계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마오쩌뚱 사후 중국에서 덩샤오핑이 집권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합리적인 성격의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개혁 개방을 통한 경제적 발전에 관심이 더 높았고, 항일전쟁과 중국 내전 당시 동북쪽이 아닌 서남부 쪽에서 주로 활동을 했기에 마오쩌뚱과 김일성만큼의 끈끈한 전우애가 없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의 개혁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정치적으로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사실은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친해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급격한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중국과 북한의 국력의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지면서 과거의 전우이자 대등했던 관계는 점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물론 표면적으로 덩샤오핑은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극진히 예우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가 7~80년대에 해당된다.


6.
1990년대 들어와 북한은 본격적인 ‘고난의 시기’에 직면하기 시작한다. GDP는 60년대와 별 차이가 없었는데 군사력 유지를 위한 비용은 날이 갈수록 부담이 가중되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소련의) 공산주의 원조가 끊기기 시작했고, 미국의 경제제재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인민들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식량난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95년 발생한 대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직접적인 식량난의 이유로 꼽히지만 사실은 (소련의 붕괴로) 천연가스 등의 수입이 불가능한 가운데 산림을 깎아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한) 연료로 사용하고, 식량 확보를 위해 개간지를 사용하는 등의 이유로 ‘심각한 산림훼손이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이 당시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매년 급격하게 줄어들어 자급률이 58%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굶주림으로 인한 아사자와 난민들이 속출했다. 북한은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이라 칭했지만 정말 상상 이상의 큰 고통을 겪던 시절이었다.


7.
이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이 의지할 곳은 오직 중국밖에 없었다. 붕괴된 소련의 경우 공산주의 근원지로서 '코민테른'을 통한 사상교육을 받았던 곳이라 일종의 ‘선생님’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면 중국의 경우는 과거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함께 통일전쟁을 벌이던 ‘형제의 국가’이니 김정일 입장에서는 중국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우방이었다.


8.
그런데 천안문 사태를 겪고 정치적으로는 도리어 일당독재의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면서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던 (장쩌민 시대의) 중국은 그렇게 나이브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공산주의 원조국으로서 ‘전 세계 공산 국가들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경제적 원조를 해 줘야 한다’는 소련과는 달리 중국은 (타고난 왕서방의 상업 DNA 탓인지) 경제적으로는 ‘급속도의 자본주의화’ 되어가고 있었기에 과거와 같은 ‘조건 없는 도움’보다는 ‘이익이 되는 비즈니스’를 선택했다.


결정적으로 과거의 끈끈한 기억을 가진 이들이 세월이 흐른 탓에 별로 남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중국은 대국이 되어 가는 가운데 이웃 소국이 자꾸 선대의 인연을 들먹이면서 도움을 청하니 '그다지 기분 좋을 리 없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한쪽이 가세가 기울면 친분 유지가 어려운 우리네 보통 사람들처럼 말이다.


9.
결국 북한이 택할 방식은 ‘핵과 미사일(ICBM) 개발’ 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제제재를 풀도록 하는 것, 과거의 전우에게 쩌리 취급당하지 않고 제대로 된 대우를 하도록 하는 것, 당시 한국에서는 인도적 차원의 경제적 원조가 시작되던 시절인데 '거지가 적선을 받는 느낌' 보다 차라리 '삥을 뜯는 것' 같은 우월한 존재감을 보이는 것 등등… 명분은 차고 넘쳤다.


그들에게는 오직 '핵과 미사일 개발의 성공'만이 '살 길'이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서 영화 '강철비'를 보면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의 울분 섞인 대사가 좀 더 잘 이해될 것이다)


10.
반면 중국은 가장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던 90년대에 자본주의의 단맛을 톡톡히 보고 있었는데 이는 가난했던 이가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되면 '통 큰 기부'나 '더 큰 경제활동'을 하기보다는 작은 계산에 더욱더 민감해지는 안 좋은 답습을 과거에 전우인 북한에게 하고 있었다.


경제지원은 (생색낼 수준의) 딱 필요한 만큼만 했고, 경제특구 등 북한이 원하는 중국식 개혁개방에는 너무 눈앞에서 대놓고 주판을 튕겼다. 과거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게 강제 개방당했던 '조차지 형태'의 특구 형태로 진행하려고 하니 명분도 실리도 북한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시절 김정일은 많이 씁쓸했을 것이다.


11.
그래서 북한은 별도의 경제 특별 행정구를 추진했다. 바로 ‘신의주 특별 행정구’였는데 기존의 나진-선봉 경제특구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은 행정, 입법, 사법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태로 그야말로 완벽한 개혁 개방의 수준을 의미한다. 중국이 홍콩 옆 선전을 개방하던 것보다 헐씬 강도 높은 수준인데 그만큼 북한은 절실했다.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이 신의주 특별 행정구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어 해당 지역의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하면서 투자와 개발의 총책임을 맡은 사람은 '양빈'이라는 사람인데 중국계 네덜란드인이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중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고생하다가 네덜란드로 유학 가서 농업 및 첨단 화훼산업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졌는데 중국 언론에서는 ‘사기꾼’으로 묘사되고, 홍콩 언론에서는 ‘비운의 사업가’ 정도로 묘사가 된다. (이 사람에 대한 것만으로도 하나의 글을 쓰기에 충분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13.
다만 그가 사기꾼이거나 혹은 유능한 사업가이거나 중요한 것은 북한에서는 그를 먼저 초청해서 1년 넘는 긴 시간 동안 협상을 했다는 것이고 결국 북한의 경제개혁 개방을 위한 핵심 인물로 신뢰했기 때문에 초대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장관으로 임명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양빈은 장관 임명장을 받은 직후 중국에서 공안에게 전격 체포되었고 (여러 가지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18년 형을 최종 언도받아 현재 선양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 심지어 그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북한에서는 그의 선처를 요구하는 공식 요청까지 중국 정부에 보냈음에도 중국 정부는 가차 없이 그를 감옥에 보내 버렸다. 때문에 신의주 특별행정구는 법안도 통과되고 장관까지 임명된 가운데 사실상 모든 계획은 붕괴되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명분과 실리를 다 잃어버리면서 한 마디로 완전히 체면까지 망가지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14. 
이 양빈 사건이 중국에서는 중국법에 의거해 단죄를 내린 정당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중국 정부를 통하지 않고서는 경제 개방은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대로 가면 중국의 속국이 되던가 혹은 굶어 죽을 수 있겠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상가상으로 90년대부터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으로 편입시키는 동북아 공정이 한참이었으니 북한의 위기의식은 당연하다고 보인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중국에 대한 절대적인 우방국으로서 남아있던 ‘마지막 전우애와 믿음’를 버리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15.
“그래, 너희가 우리를 미국과의 군사적 완충지 수준으로만 이용한다면 우리도 너희를 미국의 적대적인 위험 속에 숨는 용도로만 이용해 주마. 서로 필요한 만큼 이용만 해 주는 관계란 말이지....”

아마, 대충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 김정일에 이어 아들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때문에 더더욱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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