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30
어릴 적 거실 텔레비전 채널권은 아빠의 절대 권한이었다. 은하철도 999를 탄 철이가 이번 역은 어느 행성에 내렸을까 너무 궁금해도, 아빠가 거실에 계시면 홍콩 무술스타들을 함께 봐야 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우리 아빠도 무술영화를 보면서는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셨고, 보다 보니 정말 재미있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영화들을 아빠와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누는 것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아이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아빠와 함께 보다 보니 특기는 성룡의 취권 따라 하기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엽문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며 영춘권에 환호하는 자가 되었다. 아빠가 “엽문 한다.” 하시면 후다닥 아빠 옆에 나란히 앉아서 감탄사를 연발했었다. 절제되고 깔끔한 움직임으로 악당무리를 고고하게 무찌르면서 엽문은 우리의 우상이 되었다.
살면서 순간순간 아빠와 많이 닮은 내 취향을 발견하면서 놀라는 일이 많다. 중2병 말기 즈음에 내 출생의 비밀을 혼자 수사 중이던 어느 날에도, 엄마는 아빠와 나를 묶어서 싹수없는 김 씨들이라고 욕했었다. 암만 봐도 하는 행동이 똑 닮아서 더 얄미웠겠지. 나는 영락없는 우리 아빠 딸이구나 싶었다. 참 많이 닮았다.
결혼하고 한창 아기 키우기에 정신없었을 때에 ‘엽문 4: 더 파이널’ 영화가 개봉했다. 더 파이널이라니, 이제 정말 엽문의 마지막인가? 엽문은 나이가 많이 들었을까? 여전히 강력하고 깔끔한 영춘권으로 모두를 제압할까? 어서 빨리 가서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나와 함께 ‘엽문 더 파이널’을 영화관에서 감동 깊게 봐줄 친구가 없었다. 여자 어른이 좋아할 장르가 아니기는 하다. 이건 누군가와 함께 보고 함께 열광해야 재미인데... 그 상황이 되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화가 났다. 아빠 빈자리를 또 깨닫게 하는 엽문에 화가 난 건지, 엽문을 연기하는 배우는 아직 팔팔한데 우리 아빠만 너무 일찍 가버린 게 마구 억울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주 분노에 휩싸이던 때였고 그 방향도 없는 어지러운 때였다. 이상한 분노는 그 영화를 절대로 보지 않음으로써 혼자 표현했다.
아직도 궁금하다. 엽문 더 파이널은 정말 이야기의 끝을 맺으면서 끝났을까? 영춘권은 배우가 젊을 적처럼 멋졌을까? 그때 아빠가 계셨다면 둘이 함께 엽문을 보러 영화관에 가기도 했을까. 누려보지 못한 시간은 간절하고 영원히 아쉽다.
나른한 주말 낮, 햇살이 커튼을 넘어 노란색으로 물든 거실에 똑 닮은 아빠와 내가 눈을 반짝이며 앉아있다. 입을 모아 엽문을 찬양하며 신나 하는 우리의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이 되어 내 눈 속에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