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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 진 Jun 24. 2021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안돼"라는 거절의 말은 나를 작아지게 해.

어제는 신경정신과 진료를 다녀왔다. 발병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병원에 갈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좋아하는 차를 마시고, 가벼운 명상을 한 후 병원으로 향한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까? 주치의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때는 괜찮은데, 진료를 시작하기 전까지 기다림의 무게에 숨죽인 김장철 배추처럼 생기를 잃는다.  


지난 2년 동안, 1주일에 한 번에서 2주에 한 번, 지금은 3주에 한 번씩 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커다란 비닐봉지 가득 약을 처방받아왔다. 지금은 약의 개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처음엔 먹어야 하는 약의 양이 너무 많아서 놀랐었다. 발병 후 약의 개수가 줄어들어 지금은 하루에 먹어야 할 약의 개수는 20알 정도 된다.


2년...

짧지도 길지도 않는 시간, 나는 여전히 트라우마 장소에 가지 못하고 학교를 생각하면, 가슴에 무거운 돌 하나를 올려놓는 듯하다. 이 답답증이 트라우마 증상인지, 폐쇄적 공간에 대한 자동적 신체 반응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약을 먹을 때마다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부족한 사람(약 없이 정상생활이 불가능한)으로 판단되어 우울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작가가 되고 예술치료학과 공부를 하며, 다시 성공의 경험을 늘리고 있지만, 매일 기운이 넘치지는 않는다. 발병 이후, 새로운 만남 속에서 새로운 배움에 기뻐하고 에너지를 뿌리고 다녔는데, 체력 고갈이 심하게 느껴졌다.

아니 정서적 고갈이 더 컸다.


최근 일주일은 깊은 우울의 협곡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다. 어젯밤에는 몇 개월 만에 공황발작이 찾아왔다. 과호흡을 시작으로 하여 가슴통증과 손발이 저리기 시작했고, 첫째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약을 삼켰다. 발작 증상으로 약과 물을 몇 번이나 토할 뻔하는 중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약을 씹듯이 삼킨다.  수 분이 지난 후 과호흡 증상이 가라앉자 구토와 두통이 몰려왔다. 감정이 완전히 뭉개진 상태에서 찾아온 발작은 나를 깊은 늪으로 쑤셔 넣었다. 나의 발버둥은 얼마나 초라했는가...


'죽고 싶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이 고통을 다시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아이들은 나의 발작을 처음 보았다. 직접 눈앞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나를 끌어안고 큰 아이는 엉엉 울으며 119에 전화해달라는 말을 허공에 외쳤다.


"엄마, 괜찮아?"를 연신 질문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통증에 몸이 저절로 베베 꼬였고, 눈물, 콧물, 침이 머리카락에 엉겨 붙었다.


발작의 순간은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생명의 유한성을 익히 알고 있지만, 우리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죽음의 소식이 전해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로 애도를 표현한다.

나는 지난 2년간 거의 매일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자살충동이 아니라 염세주의적 태도가 더 가깝겠다) 죽음에 대한 책을 읽고 사후 세계를 상상하고 인간의 시작과 끝을 질문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절대 알아낼 없는 것은 인간의 시작과 끝이다. 절대 현실에서 관찰될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련의 증상을 지켜보며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인정하기까지 1주일이 걸렸다. 전처럼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건 아니니까 기말고사 이후 지쳐서 오는 우울감일 뿐 우울증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요즘 내가 보는 세상은 전보다 더 안개에 휩싸였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응원해주지 않는다. 그는 공동운명체가 아닌 것 마냥 행동하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적잖은 실망을 느낀다. 발병 이후 변해가는 나를, 그는 당황스러움과 헛헛함을 안고 바라보면서 집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새로운 선택으로 인한 삶에서 전보다 즐거워진 나는 괜한 자책에 휩싸이기도 하고 억울함에 깊이 침잠하며 그에게 요청하지 못하는 몇 개월을 보냈다.


여전히 감정 기복이 심한데 그와 나의 관계에서는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는 20년 간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를 지켜왔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였다. 가끔 아이들에게 건강한 부부의 모습을 모델링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이고, 내가 내놓은 의견을 다 듣기도 전에 "안돼"부터 외치는 사람이다. 다른 대안이나 의견의 제시가 없다.

일단 맘에 안 들면 무조건 반대다. 매일 반복되는 거절은 나를 작아지게 했고, 어차피 거절당할 텐데 라는 생각은 대화의 시도조차 사라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학습된 무기력에 빠졌다. 그렇게 응어리를 가진 채 조각나기 직전의 유리와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로 유지되는 관계도 있다. 아주 잠시 균형이 흐트러지면 모든 것이 와장창 깨어진 파편이 되어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우리에게 있었던 신뢰와 사랑은 어느새 권위와 역할 수행의 관계로 바뀌었고 그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그를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면 '따지고 든다'는 반응을 보이는 전형적인 꼰대이다. 어떻게 질문하지 않고 그를 온전히 알 수 있단 말인가!


2021년이 되고서는 집안일을 나누어서 하는 것조차 그는 기피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생산이 눈에 띄지 않을 뿐 나름대로 계속 투자를 하고 성장을 하고 있는데, 통장에 액수가 찍히지 않으니 그는 인정할 수 없단다.(한마디로 돈을 벌어오거나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흑백논리를 접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부부가 가정경제를 함께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는 경제논리를 가진 그는, 나의 발병 이후 혼자서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는 파워 당당함으로 나의 목을 틀어쥔다.

만약 나에게 안정적 직장이 없었어도 그는 오랜 연애를 이어왔을까? 나와 결혼했을까?라는 의문까지 품을 정도로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생겼다. 나의 보호자가 나의 질병을 이해하지 못할 때 얼마나 커다란 좌절을 맛보는지 처절하게 배우는 중이다. 공황장애 환자들에겐 가족들의 이해가 정말 중요한 치유의 통로이다.




지지난주에 기말고사를 마치고 일주일을 넘게 앓았다. 시험기간 동안 카페에서 공부를 했더니 냉방병이 왔고, 올해는 유독 햇빛 알레르기가 심해서 팔에는 수포가 올라왔다. 급기야 지난주에는 큰애와 함께 임파선염이 와서 또 항생제를 복용하고 있다.


2021년은 1월부터 6월까지 꾸준히 항생제를 먹고 있다. 항생제와 공황장애 약을 같이 먹자 몸은 늘 퉁퉁 붓고 살이 급격히 쪄서 작년 여름에 입었던 옷들을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날은 아예 잠들지 못하다가 어느 날은 15시간을 내리 자기도 한다. 그럴 땐, 온몸이 근육통에 시달리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살찌는 외적 변화가 나의 자존감도 함께 떨어뜨렸다.


생활패턴이 무너지고 남편에게 어떤 제안을 꺼낼 때마다 "안돼"라는 대답이 반복적으로 돌아오자 이제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가장 지지해줘야 하는 사람이 안된다고 하는 상황, 돈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일단 저지르고 보겠는데 2년을 쉬면서 통장잔고는 바닥이 드러났다. 남편에게 지원을 해달라고 하자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하는 건 '사기'라고 말한다. 누구 남편인지 공사 구분이 아주 철저하다.


현실적 벽을 마주하자 갑자기 현타와 함께 '열심히 해서 뭐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엇이라도 열심히 하고 싶어도 무조건 반대하는 남편이라는 벽을 마주하자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갑자기 화가 나며, '저 인간이 바뀌겠어?' 싶다가 어디 저렴한 동네로 이사를 갈까 싶어 검색을 해보면 우리 동네만큼 다른 동네도 집값이 올랐다. 좀 괜찮다 싶은 집을 찾으면 아이들 다닐 학교와의 거리가 멀고 남편에게 차를 한 대 더 사자고 몇 달째 얘기를 하지만, 절대 NO를 외치는 그이다. 혼자서 고민하고 아이들 등하교 방법을 생각해보다 결국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현상유지 중이다.


어제는 한없이 작아지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어떻게든 되게 하는 방법을 찾아보니, 무리수를 둬야 한다. 기회가 온다면 잘할 자신은 있는데, 모든 것이 돈과 육아에서 턱턱 걸린다. 나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30대였을 땐, '망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하고 생각했는데 40대가 되자 실패와 가난이 두렵다. 절대적 빈곤의 끔찍함을 어릴 때 경험했던 나는 다시는 그런 가난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대체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일단 움직여보니, 무엇을 하든 씨드머니가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벽 앞에 마주 선 느낌은 결국 어젯밤 공황발작이 되어 나를 덮쳤다. 나는 공황과 동행하는 삶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두렵다. 그것을 알고 인정한다고 해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겪어본 고통이지만 공황발작은 겪을 때마다 극심한 죽음의 공포를 맛보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린다. 이 문을 열까, 말까...


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아이들이 내 눈앞에서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 선택지는 하나다. 나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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