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성장과정과 가정환경이 연애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가족소개를 하겠다.
난 외동딸로 한국에서 태어나 만 9살에 해외로 부모님과 함께 이민을 왔다. 부모님은 맨땅의 헤딩이 과언이 아니라고 불릴 만큼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이것저것 교육에 관련된 사업을 작게 시작하셔 결국엔 큰 규모의 학원으로 키우셨고, 다른 아이디어들을 통해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공적으로 사셨다. 두 분의 덕분에 나는 늘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할 수 있었고 단 한 번도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적이 없었다. 두 분께서 사업을 하셨던 터라 자식만큼은 업 앤 다운이 심한 사업보다는 조금 더 안정적인 전문직이 좋지 않을까 하시는 마음에 음악을 할 거면 교수직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비치셨고 나 또한 나쁘지 않은 길인 것 같아 늘 관심 있던 의학 쪽의 길은 잠시 옆으로 두고 음악의 길을 걸었다. 우린 정말 평범한 이민가정이다. 세 식구 밖에 없기에 식구가 많은 가족들보단 모든 게 소규모였지만 대신 정말 가깝고 정서적인 대화가 잘 통하는 집이다. 나는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고민들 또한 늘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 우리 부모님은 영어가 친숙하시지 않은 터라 해외에 오래 사셨어도 한국말이 더 편하시고, 한국적인 사고가 없지 않아 남아있으시지만 그래도 굉장히 융통성이 많으시고 나름 열린 마음고 시각으로 세상을 보신다. 난 어렸을 때부터 조용했지만 묵묵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늘 해왔고 밝고 씩씩하며 오뚝이같이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일어설 줄 아는 성인으로 성장했다.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내 주변 친한 지인들이 착각을 했던 게 뭐냐 하면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많다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라는 생각이다. 세상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특이한 사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C의 가족을 소개하겠다. C는 세 자녀 중 장남이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유아기 시절을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보냈고 다섯 살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들어가서 생활했다. 그를 통해서 들었던 그의 유년시절과 가족은 참 특이했다. 그의 할아버지께선 북에서 예전에 건너오셨고 한국에서 재혼을 하셔서 늦은 나이에 지금 C의 아버지를 낳으셨다. 나이차이가 나는 부모님에게서 자라온 C의 아버지는 가족 간의 위계질서등 기강에 대해 교육을 받으셨고 그것이 자연스레 C와 C의 남동생에게까지 이어졌다. C의 유년시절은 천방지축이었다고 한다. 에너지가 고갈될 줄 몰라 그의 어머니가 애를 먹으셨다고 한다. 특이했던 것은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시절 그의 취미 중 하나가 골목길을 구석구석 다 둘러보는 것이었다. 3-4살 터울의 두 동생들이 있었기에 당연히 자식들에게 평등한 관심을 줄 수 없던 C의 부모님 덕에 C는 혼자서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동생들이 조금씩 크면서는 함께 놀기 시작했지만 그전까지는 어린 나이에 혼자서 등원하고 가끔은 놀이터에 가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들과 어울려 하루종일 저녁이 될 때까지 놀았다고 한다. 물론 세 자녀가 있는 집이었기에 집밥 메뉴를 감히 고를 수 없었고 어머니께서 준비하시는 음식을 그냥 먹었다고 한다. 난 아직까지도 그의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서 그분들만의 사랑의 방식으로 세 자녀에게 표현을 하시고 지원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방법이 조금 독특했을 뿐이지.
그의 가족에 대한 일화들을 풀어보겠다.
1. 할아버지께서 어느 날 우편물을 잘못 전달받으셨고 하필 그때 우편물을 넣던 우편집배원과 마주치시곤 그분의 뺨을 때리셨다. 황당한 우편집배원은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셨고 그의 할아버지는, "네가 실수를 했으니 이걸 계기로 일을 잘하라는 의미에서 내가 너에게 가르침을 준거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2. 위에 일과 조금 이어지는데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기업에서 (그 당시 한국 회사문화는 선배들이 후배들을 많이 다그치고 갈구는 걸로 알고 있다) 하루는 실적이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후배들을 불러 그분들에게 뺨을 때리셨다고 했다. 그리고 연말이나 새해가 될 때 그 후배분들께서 인사치레로 C의 아버님께, "선배님 그때 정말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했다며 C와 밑에 동생들에게 뿌듯하시다는 듯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3. C의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자식들에게 올인을 하신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이다. 특히 학구열이 높으셨던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국제학교에 보내시기 위해 애쓰셨다. 국제학교이기 때문에 모든 수업은 당연히 영어로 이루어졌으며 미국학교 시스템을 사용했다. 미국 학교에선 졸업을 앞둔 고3중에 Valedictorian이라는 학생을 뽑는데 그 학생은 졸업식 때 전체 졸업생을 대표해 짧은 연설을 하는 명예로운 상중에 하나이다. 뽑는 기준은 졸업반 학생들 중 성적이 가장 높은 학생으로 선정한다. C가 고3이었던 첫 학기에 다른 지역에서 이사를 온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성적이 가장 높아서 자연스럽게 그 아이를 valedictorian으로 세우기로 했는데 C의 어머니는 그게 불만이셨는지 학교 선생님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가며 전화를 거셔서 항의를 하셨고 항의전화에 스트레스를 받은 선생님들이 C에게 직접 "어머니께 말씀 잘 들려줘 C야, 우리가 너한테 안 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기준이 그런 거라 어머니께 꼭 말씀 전해줘." 결국 C는 뽑히지 못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때 항의를 하셨던걸 "내가 우리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다"라며 뿌듯하게 여기신다 했다.
이 세 가지의 일화들을 듣게 된 게 서로 결혼결심을 한지 얼마 안 되서였다. 내 입장에선 그의 가족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평범하지 않고 굉장히 욕심이 많은 집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했고 C에겐 너희 아버님께서, 너희 어머님께선 이러신 분들인 것 같다고 말을 했을 때 C의 표정은 응? 난 그런 거 전혀 몰랐는데?라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 부모님이 그렇다고? 그런가?라고 했던 게 아직도 떠오른다. 빨리 감기 해서 온갖 풍파를 다 겪은 후에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자기 말이 다 맞았어. 나만 우리 부모님을 몰랐었던 거야." 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와 어렸을 때부터 학교를 다니던 동창생들의 어머니들께서 가끔 C에게, "어휴- C는 나중에 장가가기 힘들겠어 어머니가 널 너~무 사랑하셔서."라고 말했던 것들이 이젠 퍼즐조각처럼 딱딱 맞춰진다며 그의 어머니가 장남인 그에게 쏟아부은 사랑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고 했다.
물론 사람은 가족에 대해서 다 아는 것 같다가도 모르는 구석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도 나로 통해 이번일을 겪으시면서 나에 대해서 몰랐던 모습을 많이 보시며 놀라셨고 실망도 하셨지만 받아들이셨다. 나도 나름대로 정서적으론 잘 분화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것들을 부모님께 의지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독립을 하려면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 나도 그렇고 C도 그렇고 부모님들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지 꽤 되었지만 정서적 독립은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내 가족은 많은 대화를 하지만 너무 서로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며 깊이 파고들었다면 C의 가족은 너무 정서적인 대화가 없어서 문제였다. 대화를 많이 나눠도 문제, 안 나눠도 문제.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혀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가장 신기하게 느꼈던 우리 둘의 정서적인 차이는 행복에 관한 것이었다. 난 무슨 선택을 하던 항상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걸 기준으로 두고 선택했었다.
"난 이런 걸 하면 행복하다고 느껴~ 자기는 어때?"
"내 삶의 목표 중에 행복은 없어. 행복은 그냥 내가 할 일을 잘하면 가끔 주어지는 보상일 뿐이지."
"나는 늘 행복이 목표인데? 일을 하는 것도 내가 나중에 행복하기 위해서이고, 사랑하는 것도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난 단 한 번도 우리 부모님에게서, C야, 너는 행복을 위해서 선택들을 하렴, 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응? 그럼 무슨 말을 들었는데?"
"네가 잘되야 우리 집의 가문이 잘 이어지고 네 동생들도 너를 본받을 수 있다."
"그런 게 부담되지 않아?"
"난 늘 그렇게 들어왔고 자라왔어."
"자기에겐 행복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만 당연한 건 아니고 그걸 최종목표로 두고 인생을 살 것 같진 않아."
나에겐 문화충격이었다. 서양문화에선 Do everything that makes you happy! 삶의 목표는 행복하기 위해서이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행복을 위해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한다라고 배웠던 나라 행복을 기준으로 두지 않는다는 것에 정말 놀랐다. 그는 덧붙이기를 우리 부모님은 과정보단 결과가 중요한 분들이다. 과정이 어떻게 되던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고 안 좋은 면 실패한 거다라고 생각하신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사상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결과가 좋은 거면 너무 좋겠지만 그것이 안 좋다고 해서 실패한 거다? 그럼 아이는 실패할 때마다 늘 패배감을 느끼고 내 부족함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기 위해 혼자서 싸워내야 한다는 건데 그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성인남녀 둘이 하는 건 맞지만 아직까지 한국문화에선 두 가족이 합쳐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의 뜻을 밀고 이겨내려고 하다가도 주변의 압박에 흔들리게 되는 게 한국남녀의 관계이다. 물론 현명하게 또 용기를 내서 반대되는 결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커플도 많다! 나도 그걸 꿈꿨고 C 또한 한때는 그럴 수 있다고 우리 둘만 중요한 거 아니겠냐 라며 응원해 줬지만 결국 낭떠러지까지 몰아붙여지게 되면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에선 이기적이니까.
2021-2022년엔 정말 행복한 기억들이 많았다. 지금도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눈물이 핑돌기도 하고 그 추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2023년부터 본격적인 갈등상황에 놓이면서부터 2023년의 사진들 속에 우리의 모습은 웃고 있어도 어두움이 깔려있다. 뭔가 표정이 어둡고 슬프며 위태로워 보이는 게 완벽한 이별을 하고 나니 보이기 시작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이 너무 다 부정적이지 않게 다음 편은 좋은 기억들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 끝은 이렇게 되었어도 난 그를, 그도 나를 정말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시간을 돌린다면 또 서로를 만났을 거라고 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찍는 거냐 라며 비웃음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린 이 시대에 현존하는 최고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여겼다. 양쪽 집안의 반대가 아닌 한쪽 집안의 극심한 (극심 한보다 더 강한 단어가 있다면 쓰고 싶다) 반대를 겪은 30대 남녀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